엉망으로 어질러진 집기, 커피 머신에서 수직 낙하하는 물, 플루토늄 도난 소식을 알리는 TV 뉴스…. 그 사이를 가르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친구들을 찾는 듯 잠시 투덜거리더니 기타를 앰프에 연결해 소리를 조정하기 시작한다. 굉렬한 연주가 시작되며 환상적인 세계가 열린다. 미국의 인기 밴드 마룬5의 내한 공연은 이런 영상으로 시작했다.
여섯 번째 정규음반 ‘레드 필 블루스’(Red Pill Blues)에 수록된 ‘걸스 라이크 유’(Girls like you)로 지난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던 마룬5가 27일 한국 관객과 만났다. 서울 경인로 고척 스카이돔에서 ‘레드 필 블루스’ 발매를 기념한 공연을 열었다. 이날 마룬5는 신보에 수록된 ‘걸스 라이크 유’, ‘왓 러버스 두’(What lovers do), ‘돈 워너 노우’(Don't wanna know)부터 히트곡 ‘디스 러브’(This love), ‘선데이 모닝’(Sunday Morning), ‘로스트 스타즈’(Lost Stars)까지 다양한 노래를 들려줬다.
독특한 옷 취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밴드의 보컬 애덤 리바인은 이날도 범상치 않은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흰색 반팔 티셔츠 위에 검은 후드 조끼를 입고 나타났다. SNS 상에서 놀림거리가 된 슈퍼볼 공연 의상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은 그가 입을 열면서 증발했다. 리바인은 시작부터 굵직한 히트곡을 연달아 부르며 분위기를 달궜다. 공연 초반 다소 불안했던 보컬은 공연장의 온도가 뜨거워질수록 제 자리를 찾아갔다. 리바인은 급기야 조끼를 벗어던지고 땀을 식혔다. 3만 여 명의 관객들은 ‘떼창’을 이어가며 공연을 즐겼다.
‘레드 필 블루스’에서 록 색채를 지워내다시피 했던 마룬5는, 그러나 이날 공연에선 강렬한 기타, 힘 있는 드럼 연주로 관객들의 귀를 자극했다. 4년 전의 내한 공연과 겹치는 선곡이 많았지만, 편곡으로 변화를 줬다. ‘선데이 모닝’ 도입부에 기타 연주를 넣거나 ‘뭅스 라이크 재거’(Moves like Jagger)에 ‘뽕끼’를 더하는 식이었다. 故 마이클 잭슨이 부른 ‘록 위드 유’(Rock with you)를 자신들의 노래 ‘메익스 미 원더’(Makes me wonder)에 붙여 부르기도 했다.
팬들은 자체적으로 기획해 마룬5에 호응하려 했지만 관객 전체를 아우르진 못했다. 대신 즉석에서 맞춘 합이 빛을 발했다. 앙코르 첫곡 ‘포에버 영’(Forever Young)에서 일제히 휴대전화 플래쉬를 켠 것이 대표적인 예다. 관객들이 만든 별빛 정원을 리바인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수놓았다. 이어진 ‘로스트 스타즈’와 ‘쉬 윌 비 러브드’(She will be loved)도 운치 있는 객석의 풍경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리바인은 “정말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마룬5의 국내 팬카페 회원들은 앙코르 브레이크에서 밴드의 두 번째 정규음반에 수록된 ‘워운 고 홈 위다웃 유’(Won't go home without you)를 부를 계획이었다. 많은 관객의 호응을 얻진 못했지만 이들의 절절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이벤트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중략) 당신 없이 집에 가기 싫어요.’(노래 가사 中) 모르긴 몰라도, 마룬5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연장을 빠져나가던 관객들 중 열에 아홉은 머릿속에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