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두산’ 기틀 다진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글로벌 두산’ 기틀 다진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기사승인 2019-03-04 14:32:21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다진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3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박 명예회장은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자원해서 해군에 입대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당시 그는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취급 부서에 배치된 후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과묵한 성품 때문에 이 같은 공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뒤늦게 인정을 받아 2014년 5월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받았다.

박 명예회장은 군 제대 후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 1960년 한국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박 명예회장의 사회생활은 ‘남의 밥을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는 선친 박두병 초대회장이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라고 강조한 뜻 따른 것이다.

고인은 1960년 4월부터 한국산업은행에서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후 1963년 4월 동양맥주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선진적인 경영을 잇따라 도입하며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한양식품,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앞서 동양맥주에 재직 중이던 1964년에는 당시 국내 기업에서는 생소하던 조사과라는 참모 조직을 신설해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 수립, 예산 편성, 조사 업무 등을 수행하며 현대적 경영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 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부단한 혁신을 시도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이 대표적이다.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 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 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결단력을 통해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다진 박 명예회장은 가정에서는 더 없는 ‘애처가’였다. 부인 고(故) 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여사는 박 명예회장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이자 ‘조언자’였다.

하지만 이 여사는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박 명예회장은 암 투병 중이던 부인의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간병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 떠나보낸 아내를 한결같이 그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23년간의 ‘사부곡’(思婦曲)을 써내려 왔다.

유족들 역시 박 회장의 가정에서의 모습에 대해 “아내에 대해 평생 각별한 사랑을 쏟은 남자”로 기억한다.

고인의 야구에 대한 각별한 사랑도 유명하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때 가장 먼저 야구단 ‘OB 베어스’를 창단했으며 어린이 회원 모집도 가장 먼저 시작했다. 몸이 불편해진 뒤에도 직접 훈련장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몸이 불편해진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베어스 전지훈련장을 찾아 선수들 손을 일일이 맞잡았으며, 이전 시즌 기록을 줄줄이 외우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2008년 4월 17일 77세 희수연 때 자녀들로부터 등번호 77번이 찍힌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받아 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 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5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발인과 영결식은 오는 7일,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임중권 기자 im918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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