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글) XXX, ○○○, △△△…. 정준영 리스트라네요.”
모바일 메신저와 SNS를 중심으로 이른 바 ‘정준영 리스트’가 확산되면서, 피해 당사자의 2차 피해는 물론 애먼 여성 연예인들의 추가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안일한 인식이 빚어낸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정준영은 2015년부터 약 10개월간 여성들과의 성관계 장면을 불법으로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을 지인들과의 카카오톡 대화방에 전송했다. SBS가 공개한 대화 내용에 따르면 정준영과 지인들은 이런 불법 촬영물을 ‘야동’이라고 부르며 희화화하고, ‘강간하자’와 같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대화에는 가수 등 유명인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준영과 지인들의 대화 내용 자체도 충격적인데, 이에 대한 반응도 참담하다.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엔 ‘정준영 동영상’이 올랐다. 더 나쁜 건 여성들에게 2차 피해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라시’라고 불리는 증권가 정보지를 통해 불법 촬영 피해 여성 명단이 돌면서 애꿎은 여성 연예인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일부 언론은 피해자의 신상을 드러내는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하며 어긋난 호기심에 기름을 부었다.
‘지라시’에 이름이 거론된 배우 이청아, 정유미, 오연서, 오초희 측은 일제히 입장문을 내 “현재 유포되는 악성 루머는 모두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앞서 정준영과 관련한 또 다른 ‘지라시’로 피해를 입은 그룹 트와이스 측 역시 “아티스트에 대한 악성 루머의 생산과 유포는 사이버 명예 훼손죄 및 모욕죄등을 근거로 한 즉시적인 고소 및 고발과 형사 처분이 가능하다”며 “현재 본 사안에 대한 증거 수집 및 내·외부 로펌과 조치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알렸다.
앞서 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가 사내 이사로 있던 서울 강남의 클럽 버닝썬 VIP룸에서 조직적 성범죄가 벌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다. 소위 ‘버닝썬 동영상’이라고 불리는 불법 촬영물이 온라인을 통해 유포됐다. 경찰은 이달 초 약물 성범죄 의혹을 받는 ‘버닝썬 VIP룸 동영상’ 촬영·유포 혐의자를 구속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유포된 영상을 공유하거나 시청하는 것도 범죄 행위라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13일 낸 성명에서 “피해자에게 향하는 화살을 성폭력 피해를 상품화해 재소비하는 남성연대에게 쏘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사성은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과 영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이버성폭력 사건이 완성된다”며 “지금의 분노가 불법촬영물 유통 및 소지 처벌을 제도화하는 힘으로 모이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사성의 이효린 활동가는 “불법 촬영물이나 피해자를 수소문하는 행위는 호기심이 아닌 또 다른 가해”라고 꼬집었다. 이 활동가는 “온라인이나 메신저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며 “피해자를 궁금해 하는 분위기나 언론 보도 때문에,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는 거나 피해를 회복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중이 피해자를 보호하고 연대하는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신상을 다룬 언론 보도에도 이 활동가는 분노했다. 실제로 한사성은 “‘정준영 몰카’ 피해자에 걸그룹 출신 1명 포함”을 보도한 채널A의 취재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활동가는 “언론이 자꾸 피해자가 누구인지 초점을 맞추게 되면, (대중은) 궁금하지 않더라도 그와 관련한 정보를 접하게 된다”면서 “피해자가 아닌 가해 행위를 조명해서 이것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짚어내야 한다”고 봤다.
한편 정준영은 지난 12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입건돼 오는 14일 경찰 조사를 받는다. 사건을 촉발한 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와 유리홀딩스 유모 대표도 같은 날 경찰에 출두해 조사 받는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