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드러머 걸’ 거짓 연기가 진짜 현실이 되는 순간 [왓챠플레이 도장깨기]

‘리틀 드러머 걸’ 거짓 연기가 진짜 현실이 되는 순간 [왓챠플레이 도장깨기]

‘리틀 드러머 걸’ 거짓 연기가 진짜 현실이 되는 순간 [왓챠플레이 도장깨기]

기사승인 2019-04-06 08:00:00


생각해보면 스파이는 연기자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 24시간 다른 누군가의 삶을 연기하며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걸어가는 길과 머무는 모든 공간은 연기를 보여주는 무대이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조연이다. 삶의 대부분 시간을 다른 인물로 사는 그들이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배우들이 깊게 몰입한 작품을 마치고 다시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힘들어하는 것과 닮았다.

지난달 29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국내에 공개된 박찬욱 감독의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은 평범한 배우 지망생 찰리(플로렌스 퓨)가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의 스파이가 되어 팔레스타인 혁명군 내부에 잠입하는 내용을 그렸다. 누군가의 후원으로 그리스로 가게 된 찰리의 극단은 그곳에서 수상한 남자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를 만난다. 가디에게 매력을 느낀 찰리는 일행과 떨어져 단둘이 아테네로 향한다. 데이트를 즐기던 도중 가디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찰리는 모사드 고위요원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를 만나 현실 세계의 테러리스트 배역을 제안받는다.

‘리틀 드러머 걸’은 로맨스 비중이 높은 1970년대 유럽 배경 스파이물이다. 단호하고 냉정한 마틴 쿠르츠가 극의 중심이 되면 어둡고 음울한 스파이 드라마가 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디 베커가 중심이 되면 치명적인 로맨스 드라마로 돌변한다. 상반된 두 가지의 결합만으로도 기존 스파이 장르물의 편견을 부수는 독특한 작품이 된다. 실제로 누군가는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찰리의 존재가 익숙한 구조를 완전히 뒤바꾼다. 찰리는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파이 세계를 전혀 모르는 철저한 외부인이다. 자신만의 신념이 뚜렷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 평범한 영국 배우다. 쿠르츠는 찰리가 연기 외적으로도 자신의 삶을 꾸며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란 점에 주목했다. 무대 밖 일상에서 연기하는 삶에 익숙하다는 걸 스파이로서의 재능으로 판단했다. 거기에 여권이 깨끗한 영국인이란 점은 팔레스타인 혁명군도 탐낼 인재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쿠르츠는 찰리에게 테러리스트 쌀림의 애인 역할을 맡긴다. 제안을 받아들인 찰리는 현실과 무대, 진실과 거짓의 경계 어딘가에서 혼란을 느끼며 앞으로 걸어간다. 당차고 거침없는 찰리의 세계는 연극과 현실을 오가는 한 편의 드라마다.

쿠르츠는 찰리가 스파이로서 연기를 잘 해내며 제 역할을 잘 수행하길 기대한다. 베커는 찰리의 안위에 온 신경이 쏠려있다. 정작 찰리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쿠르츠의 연출과 베커의 조력 하에 현실 세계에서의 연기를 그럴 듯 하게 해내는 것엔 어려움을 느끼진 않는다.

문제는 주어진 대본으로 시작한 찰리의 가짜 연기가 진짜 현실이 되어가면서 시작된다. 새로운 역할에 낯설어하고 의심하던 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베커부터 적군의 인물들, 유럽 각지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을 모두 진실로 느끼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그건 진짜였다. 거짓은 찰리 하나다. 그렇다면 찰리가 진실된 태도로 새로운 사람들을 대하고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면 불안 요소는 사라진다. 쿠르츠의 눈엔 찰리가 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삶도 불안하지 않고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스파이가 아닌 배우 찰리가 진짜 연기에 매혹되는 당연한 일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가장 극적이고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서 시작해 가장 개인적이고 진실된 이야기로 흘러간다. 시종일관 어두운 공간에서 묵묵히 맛없는 빵을 씹으며 일하는 모사드 직원들과 밝은 곳에서 활기 넘치는 새 삶을 사는 찰리의 이미지가 드라마 내내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며 교차한다. 박찬욱 감독이 강조했던 콘크리트 건축물과 원색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한 장면에 담긴 이미지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답게 아름다운 영상의 구도와 색감, 미술, 음악 등 이야기 외적으로도 볼거리가 넘친다. 익숙지 않은 외국 배우들의 연기에 부족함이 느껴지진 않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측면도 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초반부 작품 설명을 넘기면 물 흐르듯 감상할 수 있다. 6부작 드라마보다는 6시간 분량의 영화에 가깝지만, 다음 회를 보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으로 마침표를 찍는 드라마의 특성을 살린 점도 눈에 띈다.

왓챠플레이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직접 재편집한 감독판 6부작을 만날 수 있다. 채널A에서도 매주 금요일 오후 11시 방송 중이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왓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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