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 (재위 1418∼1450)이 도둑들에게 자비와 온정을 베푸는 형사정책을 펼치다 재위 후반 도둑과 전쟁에 휘말려 숱하게 고초를 겪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조병인 전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30일 학술지 ‘형사정책연구’ 여름호에 실은 ‘세종시대 도둑과의 전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세종 즉위 이후 28년 동안 매년 50명 안팎에 머물던 처형 인원은 재위 29년부터 31년까지 180~250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조 전 위원은 연구 결과, 세종이 이전까지 절도 3범은 중벌 원칙에 따라 사면과 상관없이 교수형에 처하던 것을 재위 4년 12월부터 사면 이전 전과를 눈 감아주다가 23년 뒤 다시 중벌로 돌아간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다음해 1월 형조에서 그 해에 사형을 선고받은 30여명의 명단을 아뢰자, 사형수가 너무 많다며 사형을 구형하는 기준을 더 엄격히 고치게 했다. 3년쯤 뒤에는 고발인이 왕실 농장 노비라는 이유로 죄없는 백성에게 사형을 구형한 사헌부 관리들을 질책하며 “죽을죄를 저질렀어도 살릴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다. 조 전 위원은 당시 정황을 짚어보면 연달은 대기근으로 도둑이 늘어나자 세종대왕이 생계형 도둑들에게 연민과 미안함을 느낀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 세종은 도둑 대책을 '중벌(重罰)주의'에서 '온정주의'로 바꾼 이후 23년간 20차례 사면을 베풀었다.
그러나 온정주의로 바꾼 지 2년도 안돼서 한양 치안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게 조 전 위원 분석이다. 화적들의 악랄한 방화와 도적질로 인한 피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에 형조판서 정흠지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권진과 더불어 육조 판서와 합세하여 절도전과자들을 바다의 외딴섬에 가두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로 도적질로 처벌을 받은 자가 재범을 하면 처자와 함께 전라도 신안군의 자은도, 암태도, 진도 등지에 격리시켜 출입을 금하고 현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단속하도록 했다. 조 전 위원은 도둑퇴치를 위해 조선 건국 이래 최초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니 도둑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고 여길 만하다고 평가했다.
조 전 위원은 “당대 최고 수준 유학자 중 한 명이었던 세종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덕과 예에 기초한 자비로운 도둑정책을 펼쳤으나 결과는 성공과 멀어보인다”면서도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사법기관이 범법자들을 확실하게 제압한 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종이 선한 마음으로 도둑들을 자비와 온정으로 다루다 낭패를 자초한 과정을 최초로 복원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