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벌새’의 깊고 넓은 위로

[쿡리뷰] ‘벌새’의 깊고 넓은 위로

‘벌새’의 깊고 넓은 위로

기사승인 2019-08-28 00:00:00

1994년 10월21일.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리담당 공무원의 부실감사, 정부의 안전검사 미흡이 빚어낸 참극이다. 당시 한국은 국민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고, 경제성장률은 9%를 웃돌았다. 모두가 성장과 발전을 외칠 때, 사회 한구석에선 상처가 곪고 터져 구멍이 뚫렸다.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는 혼란했던 바로 그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14세 소녀 은희(박지후)는 선진국 진입을 열망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고 자랐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를 외치는 담임선생님(박윤희), 대원외고 진학을 목표로 한 오빠 대훈(손상연)과 그런 오빠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빠(정인기)는 학업을 통한 계급 상승 실현의 꿈을 신봉한다. 그리고 당시 사회가 그랬듯, 은희의 세계에도 크고 작은 균열이 인다. 은희를 향한 대훈의 폭력과 이를 외면하는 부모의 태도는 성적 제일주의와 가부장적 질서가 뒤섞여 만들어낸 비극적 풍경이다. 

은희의 일상엔 파고가 멈추지 않는다. 남자친구 지완(정윤서)은 다른 여학생과 눈이 맞아 연락을 끊고, 그 사이 동성인 후배 유리(설혜인)가 은희에게 다가온다. “그냥 언니가 좋다”는 유리의 말에, 은희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유리와 ‘잘해볼’ 생각을 한다. 믿었던 단짝 지숙(박서윤)의 배신, 유리와의 ‘썸’, 지완과의 재결합 그리고 이별…. 어른의 눈엔 유치해 보이는 사건들이 쉬지 않고 은희의 세계를 뒤흔든다. 그 가운데엔 ‘제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은희의 욕구가 있다.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는 은희를 귀여워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 유일한 어른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존댓말로 자기소개를 부탁하고, 은희와 지숙에게 운동권 투쟁가인 ‘잘린 손가락’을 불러주는 ‘별종’이다. 영지의 눈은 때로 다른 세계를 향하듯 공허하다. 작품은 영지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지 않지만, 물기 어린 눈빛, “삶이 힘들 땐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손가락만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기에”라는 말은, 자기 앞의 생을 사랑하려는 영지의 끈질긴 의지를 보여준다. 

극적인 사건이나 갈등 없이도 ‘벌새’는 상영 시간 내내 마음을 졸이게 한다. 은희가 겪는 관계의 균열들이 어느 것 하나 사소하지 않은 까닭이다. 일견 유치해 보이는 갈등도 은희에겐 자신의 우주에 금이 가게 만드는 거대한 사건이다. 관객은 어느 순간 은희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은희의 경험들을 자신 또한 경유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여성, 중학생의 카테고리에 속해본 적 있는 관객들의 심정은 남다르리라. 우린 부모의 관심에 목말랐던 딸이었고, 사회의 존중이 필요했던 학생이었기에.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가. 

박지후는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는 은희의 감정을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김새벽의 알 수 없는 표정과 낮은 음성은 영지의 신비로움과 따뜻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이 좋다. 어느 누구에게도 깊게 이입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기능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영지 선생님의 편지는 모든 삶의 이야기를 품을 만큼 넓고 깊은 위로의 힘을 지닌다. 29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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