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한스 짐머 음악엔 광활한 우주가

[쿡리뷰] 한스 짐머 음악엔 광활한 우주가

기사승인 2019-09-30 08:00:00

영화 ‘라이언킹’ OST ‘서클 오브 라이프’(Circle of Life)를 여는 목소리의 주인공, 레보 엠.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음악가인 그는 조국이 어지러웠던 시절 미국 LA로 망명왔다. 백인 일색이던 디즈니 영화가 레보 엠의 목소리로 막을 열었을 때, 그와 비슷한 처지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서클 오브 라이프’가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티스트의 인생과 영혼이 음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다.

레보 엠을 디즈니에 소개해준 이가 독일 출신의 영화 음악계의 거장 한스 짐머다. 29일 서울 올림픽로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한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응원해준 전 세계인들에게 감사드린다”며 고개 숙였다. 곁에 서 있던 레보 엠도 고마움을 드러냈다. 한스 짐머는 2년 전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페스티벌 이후 2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레보 엠도 그를 따라 2년 만에 한국에 왔다.

살아 숨쉬는 음악이 어디 ‘서클 오브 라이프’ 뿐이랴. 한스 짐머의 음악엔 광활한 우주가 있었다. 음악마다 강한 생명력이 요동을 쳤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스코어의 장엄함, ‘캐리비안의 해적’ 메들리의 웅장함과 스펙터클함,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의 파괴력, ‘다크나이트’(Dark Knight) 메들리에서의 광기…. 한스 짐머의 음악은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상상과 영감을 불어넣었다.

대부분의 넘버가 압도적인 분위기와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했으나 전부 그랬던 것은 아니다. 1·2부 오프닝곡이었던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Driving Miss Dasiy)와 ‘트루 로맨스’(True Romance) 등이 경쾌하고 낭만적인 곡들도 많았다. 한스 짐머가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의 죽음과 미국 콜로라도에서 ‘다크나이트 라이즈’ 상영 중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을 언급하며 연주한 ‘오로라’는 한편의 장송곡 같았다. 그는 “콜로라도의 작은 마을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에게 이 곡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각적 쾌감이 큰 공연이었지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곡의 분위기에 맞게 붉은 색과 황금색, 흰 색으로 변하는 조명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고, 전광판에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영상들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무엇보다 연주 그 자체가 훌륭한 퍼포먼스가 됐다. 특히 티나 구오는 춤을 추듯 첼로를 켜 시선을 잡아 끌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기세가 전사처럼 당당하고 야성적이었다. 거스리 고반(기타), 나일 마(기타), 페드로 유스타셰(피리) 등 밴드 멤버들의 연주와 국내 오케스트라, 합창단의 협연도 아름다웠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 메들리로 본 공연을 마친 한스 짐머는 앙코르곡으로 ‘인셉션’(Inception) 스코어 메들리를 골랐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갔던 영화처럼 한스 짐머의 음악도 그랬다. 거대하던 음악이 마침내 작고 연약한 피아노 연주와 전자 바이올린 선율로 수렴되고, 그 마저도 다른 세계로 빨려가듯 사라졌다. 한스 짐머의 음악은 그것이 끝나는 순간마저도 환상적이었다. 짝짝짝. 한스 짐머와 밴드를 향한 경의의 표현이자, 현실로의 통로 같았던 박수가 오래도록 공연장에 퍼졌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