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신의 은총으로’ 충격적이지 않음에서 오는 충격

[쿡리뷰] ‘신의 은총으로’ 충격적이지 않음에서 오는 충격

‘신의 은총으로’ 충격적이지 않음에서 오는 충격

기사승인 2020-01-10 07:00:00

얼마든지 ‘충격적인 실화 스토리’로 다룰 수 있을 이야기다. 교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도, 선을 실현하는 이들과 저지하는 이들의 대결 구도로 다룰 수도 있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는 익숙한 극적인 전개 대신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다. 사건보다 인물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첫 장면부터 눈을 뗄 수 없다. 은행원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린 알렉상드르(멜빌 푸로)는 프레나 신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교회 심리상담사에게 고백한다. 1980년대 초중반의 일이니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다. 알렉상드르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는 프레나 신부도 만나고 바르바랭 추기경도 만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들과 접촉하는 프레나 신부의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낀다.

혼자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알렉상드르는 공소시효가 지났음에도 사제의 아동 성범죄를 경찰에 고발한다. 그의 고발은 또 다른 피해자들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교회를 등진 채 살아가던 프랑수아(드니 메노셰)는 사건이 은폐됐다는 것에 분노하며 피해자들의 연대모임인 ‘라 파롤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를 만든다. 어린 시절 학대로 다른 인생을 살게된 에마뉘엘(스완 아르라우드)도 신문으로 소식을 접하고 피해자 연대에 합류한다.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범죄’라는 소재만으로도 반사적인 거부감이 들 법하다. 정작 영화는 조용하고 담담하다. 피해자의 아픈 과거를 전시하지도, 그들의 끔찍한 고통을 되새기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신의 은총으로’는 철저히 어른이 된 세 명의 주인공의 현재에 집중한다. 그들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어떻게 현재 되살리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차분하고 냉정한 톤으로 그린다. 중심인물들의 가족부터 프레나 신부와 추기경, 경찰은 모두 주변인에 불과하다. 자극적인 것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실수’, 혹은 ‘병’으로 치부되는 누군가의 과거 행동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하게 만든다.

세 인물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여다보는 전개도 독특하다. 알렉상드르와 프랑수아, 에마뉘엘은 어린 시절 같은 경험을 공유한 것 이외에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인물들이다. 직업이나 경제적인 여유뿐 아니라 생각하고 소통하는 방식, 이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통하는 점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다. 이 같은 설정은 인물들의 경험을 개별적 사안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들은 교회에서 성 학대를 당한 피해자라는 가상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 우리와 같은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이다. 모두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른 세상 이야기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끈질기고 묵직하게 서술한다.

국내 관객들에겐 낯선 이야기일 수 있다. 2015년부터 시작된 아동 성폭력 피해 지원단체 라 파롤 리베레의 활동은 현재진행형이다. 프레나 신부의 형사 재판과 바르바랭 신부의 항소심이 이번달 열린다. 이번에도 그들은 ‘신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까. 극장을 나와도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16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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