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 주디 갈랜드. 1922년 6월10일-1969년 6월22일. 2세 때부터 무대에 오르기 시작해 가수이자 배우로 성공을 거뒀지만, 어려서부터 겪은 정신적인 학대로 정신적인 문제를 앓다가 47세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 누구의 삶이든 그것이 한두 줄로 요약되는 순간, 그저 그런 막장드라마로 보이기 마련이다. 주디 갈랜드라고 다를까. 할리우드가 사랑한 그러나 할리우드가 죽음에 이르게 한 여인. 하지만 자신의 삶이 이런 한두 마디 말로 정리된다면 누구든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우리라.
영화 ‘주디’(감독 루퍼트 굴드)는 주디 갈랜드의 삶을 ‘비운’이나 ‘비극’ 따위의 단어로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감동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주디 갈랜드가 생전 겪은 고통을 처절하게 재현하는, 어쩌면 관객에게 가장 쉽게 호소할 수도 있을 전개를 택하는 대신, 말 그대로 ‘살아있는’ 인물로서 주디 갈랜드를 불러낸다. 신경질적이지만 위트 있고, 쉽게 상처받지만 동시에 강인하며, 행복과 불행의 끊임없는 꼬리물기 가운데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여성. ‘주디’가 보여주는 주디 갈랜드(르네 젤위거)다.
영화는 주디 갈랜드의 생전 마지막 공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네 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혼자 힘으로 두 아이를 기르려던 주디 갈랜드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아이들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공연을 떠난다. 미국에서 그는 ‘한물간’ 신세지만 영국의 사정은 다르다. 매일 밤 수백 명의 관객이 그를 보러오고 그의 목소리와 노래에 감격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그저 행복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것. 티켓 매출은 그의 숙면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관객의 환호는 내일에의 두려움을 동반한다.
무엇이 그토록 주디 갈랜드를 괴롭혔기에. 잘 알려졌다시피, 주디 갈랜드는 어린 시절 쇼 비즈니스 세계에 입문한 뒤 줄곧 정신적·신체적인 학대를 당했다. 식욕과 수면욕 같은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마저 계약 내용에 따라 ‘통제’됐다. 주디 갈랜드는 피로 누적으로 인한 각종 질병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하지만 ‘주디’는 희생자로서의 주디 갈랜드를 강조하기보다는 이 모든 상흔을 영혼에 새긴 채로도 살아남으려는 누군가를 보여준다. 영화가 주디 갈랜드에 대한 헌사로도 읽히는 이유다.
주디 갈랜드는 생전 동성애자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다고 한다. 그가 활동하던 1940~50년대 미국에선 뮤지컬이 동성애자들의 문화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주디’에서도 주디 갈랜드와 동성 커플 팬의 일화가 다뤄진다. 다른 방식으로 제 목소리가 묵살 당했던 두 존재가 노래를 통해 서로를 어루만지는 장면은, 하나의 이야기로서도 감동적이지만 음악이 가진 놀라운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르네 젤위거는 다가오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마땅한 연기를 보여준다. 예민하고, 초조하고, 신경질적이지만, 다정하고, 재치 있고, 무엇보다 사랑에 목말라 있던 주디 갈랜드의 모습을 그는 표정과 목소리, 심지어 굽은 어깨와 마른 등으로도 표현해낸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깊게 들여다 봐주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위로의 힘이 발휘될 때가 있는데, 르네 젤위거가 주디 갈랜드를 연기하는 과정도 그랬다. 영화에 담긴 주디 갈랜드의 노래는 모두 르네 젤위거가 직접 부른 것으로, 그는 영화를 위해 1년 넘게 보컬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저도 여러분 모두를 사랑해요.” 주디 갈랜드는 생전 무대 위와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만인에게 사랑받았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진 못했던 그가, 자신이 늘상 하던 “사랑한다”는 말에 응답받는 마법 같은 순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주디’는 50년을 뛰어넘어 주디 갈랜드가 지금의 관객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자, 영화가 주디 갈랜드에게 보내는 사랑과 존경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한편,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에겐 ‘주디’가 이 세계의 윤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10대 밴드가 소속사 직원을 아동학대로 고소하고, 심리적인 문제로 활동을 멈추는 스타가 며칠에 한 번 꼴로 나오는 요즘엔, 반드시 그러길 바란다. 12세 관람가. 오는 2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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