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공포영화에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제 발로 들어간 극장에서 제 발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기억해야 하는 문장이다. 귀신과 악령들이 날고 기어도 누군가는 죽지 않는다. 반대로 반드시 죽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뜬금없이 애정행각을 벌이거나, 모두가 정해놓은 룰을 맘대로 어기는 건, 퇴근 시간을 앞당기는 신호다. 그들에게 가졌던 미련을 빠르게 버려야 남은 러닝타임을 버틸 수 있다.
오디션 예능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공개한 넷플릭스 ‘더 서클’을 보기 시작한 자세는 삐딱했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우리는 오디션 예능 강국의 시청자 아니던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억도 다 나지 않는 수많은 오디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열광했고, 또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그 어느 국가에서 오디션 예능을 조작해 제작진이 검찰 조사를 받는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그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 예능을 ‘리얼리티 관찰’ 형식으로 풀어내는 미국 프로그램(영국 포맷)이라고? 비슷한 예능은 지겹도록 봤고 공식과 규칙을 이미 온 몸에 체화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은 엄마가 봤으면 등짝을 때렸을 나쁜 자세를 만들었다.
‘더 서클’은 10만 달러를 걸고 벌이는 SNS 소재의 게임 예능이다. 만나지도,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여덟 명의 일반인 플레이어가 SNS로 소통해 가장 인기 있는 한 명이 10만 달러를 차지하는 것이 기본 규칙이다. 꼭 솔직할 필요는 없다. 잘 보이기 위해 솔직하지 않은 연기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사진을 빌려오는 것도, 새로운 가상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단, 가장 인기 없는 플레이어는 탈락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10만 달러의 주인공이 되는 건 누구일까. 과연 그는 어떤 매력을 어필해 SNS 최고의 인플루언서가 된 걸까.
1회를 보면서 자세를 점점 고쳐 앉게 됐다. 1회만 보고 전체 과정을 예측해보고 내키면 우승자까지 가볍게 맞춰본 후 종료하려던 효율적인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복습한 후 혼이 나간 사람처럼 2회를 재생했다. 2회가 끝나면 3회, 3회가 끝나면 4회를 보지 않을 재간이 없다. 다음 편을 보게 만드는 미국 방송인들의 엔딩 편집점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SNS라는 신선한 소재 때문에 시작한 ‘더 서클’은 엉뚱하게도 미국 예능이란 신세계로 안내한다. 1회를 보면 금방 충격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일반인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높은 텐션으로 폭발적인 리액션을 쉬지 않고 쏟아낸다. 누군가의 한 마디에 머리를 쥐어뜯고, 침대 위에서 점프를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 이들은 각자 특유의 리액션을 보여준다. 한국 예능이었다면 당장 ‘과한 리액션 논란’에 휩싸일지 모를 정도의 호들갑이지만, ‘더 서클’ 플레이어들은 이 모든 걸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처음엔 어색했던 화려한 리액션과 해시태그, 이모지를 사용 등 미국 젊은 세대의 문화가 조금씩 익숙해져간다. 프로그램의 서사에 흥미가 떨어지는 중·후반부에 이르면, 플레이어의 리액션을 보는 게 ‘더 서클’을 감상하는 주된 목적이 될 정도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흥미를 자극했다면, 인물들의 매력은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서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평가하고 의심하고 믿는 이들의 감성에는 미세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 가치관들은 어떤 통역 없이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한국 일반인 예능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새로운 캐릭터들과 그들의 매력이 오디션 예능 형식으로 전달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결국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다. 아마 ‘더 서클’ 1회를 본 시청자들 중 최종 우승자를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을까. 사실 어느 순간부터 우승자 색출엔 흥미를 잃었다. 플레이어들이 신이 나서 음성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 경보(ALERT)가 울릴 때마다 경악하는 장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상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장면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새롭고 다양한 ‘미국’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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