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임중권 기자 =중동 대표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풍부한 매장량과 저렴한 채굴 단가를 앞세운 ‘유가 전쟁’을 본격 선언했다.
단기적인 원유 증산이 아닌 아예 산유 능력을 증강해 생산량을 대폭 올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12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11일(현지시간) 리야드 주식시장(타다울)에 낸 공시에서 지속할 수 있는 산유 능력을 하루 1천300만 배럴까지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아람코는 “지속 가능한 최대 산유 능력을 현재 일일 1200만 배럴에서 100만 배럴 더 올려 1300만 배럴로 상향하라는 에너지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아람코는 전날 4월부터 일일 산유량을 현재 970만 배럴에서 1230만 배럴로 늘린다고 예고했다. 이는 지난달 산유량보다 27%나 많다.
전문가들은 이 산유량이 아람코의 지속 가능한 산유 능력 1200만 배럴을 초과한다면서 사우디가 전략 비축유까지 동원해 국제 원유시장에 공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우디의 산유 능력을 ‘풀가동’해도 일일 1230만 배럴 수준의 원유 생산은 일시적일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아람코의 이날 발표로 이런 전망이 무색해진 셈이다.
아예 산유능력을 늘려 일일 1200만 배럴의 산유량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UAE 국영 석유회사 ADNOC도 이날 4월부터 산유량을 하루 300만 배럴에서 400만 배럴로 33% 늘리고, 500만 배럴까지 생산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계획을 가속하겠다고 발표해 유가 전쟁에 가세했다.
UAE 두바이의 투자자문사 블랙골드인베스터스의 개리 로스 창업주는 로이터통신에 “시장 점유율 경쟁이 시작됐다”며 “산유 여력이 가장 큰 사우디에 돈을 거는 게 좋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대비해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지난 6일 10개 주요 비OPEC 산유국과 추가 감산을 논의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사우디는 3월 말로 감산 시한이 끝나는 즉시 4월부터 산유량을 늘리는 공세적인 전략으로 돌아섰다. 약속한 감산량보다 더 산유를 줄인 사우디가 할당 산유량을 조금씩 넘기는 러시아에 대해 불만이 커져 공격적으로 증산하겠다고 결정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우디는 또 향후 예상되는 저유가 국면을 맞아 시장 점유율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4월 선적분 원유 수출가격을 3월보다 배럴당 6∼10달러(아랍경질유 기준) 내렸다.
거대 산유국인 사우디와 러시아는 지난 3년간 유가가 하방압력을 받는 지정학적 변수가 발생할 때마다 산유량을 조절하면서 유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들의 공조가 막을 내린 셈이다.
사우디의 증산으로 유가가 내려가면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이 부진해진다. 셰일오일은 중동 산유국의 유전보다 생산 단가가 높아 유가가 적어도 배럴당 50달러 이상이어야 이익이 남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추가 감산에 반대한 것도 러시아의 석유 산업을 제재하는 미국에 대해 유가를 내려 셰일오일 산업에 피해를 주는 식으로 ‘반격’하려는 의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사우디의 이런 공격적 증산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통화 뒤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배경에 특히 관심이 쏠린다.
백악관은 10일(미국 동부 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어제(9일) 전화 통화로 국제에너지시장(상황)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시점상 사우디는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 뒤 대규모 증산을 발표했다.
통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셰일오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사우디의 증산에 부정적인 의견을 전달했다는 관측이 대체적이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사우디는 미국의 반대에도 증산을 강행한 셈이 된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 유가 하락은 양면적이다. 유가가 내리면 싸게 휘발유를 살 수 있는 자동차 왕국 미국 내 소비자에게는 긍정적이다. 반면 중동이나 시베리아 유전보다 생산 단가가 높은 미국 셰일 업계는 부진에 빠질 수 있어서다.
지난 3년간 OPEC+(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가 감산 합의로 유가를 떠받친 덕분에 미국은 셰일오일 생산량을 늘려 석유가 넘치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될 수 있었다.
최근 수년간 국제 원유 시장이 공급 과잉 상태인데다 주요 산유국의 원유 재고도 충분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가가 급등할 가능성은 작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게다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원유 수요가 급감한 터라 현재 산유량만으로도 공급이 충분하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저유가에 대해 겉으로는 소비자에게 좋은 일이라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감산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란과 대치로 미국의 군사·정치적 지원이 필요한 사우디가 러시아를 겨냥해 증산을 주도하면서 원유시장의 3대 거인의 꼬리를 무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 것이다.
사우디가 원유 시장의 독점적 위치를 회복하려고 러시아를 겨냥해 던진 증산 폭탄의 파편을 우방 미국이 맞게 됐고 미국은 사우디를 압박했으나 사우디는 이미 강을 건넌 형국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10일 “MBS(사우디 왕세자)와 푸틴이 원유 시장 주도권을 놓고 트럼프를 숙명의 대결로 끌어들였다”며 “증산 경쟁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은 아니다”라고 해설했다.
일각에서는 OPEC+가 5월께 감산을 놓고 재협상한다는 전망도 나온다. 향후 원유 시장을 둘러싼 이들 대형 산유국이 벌이는 ‘파워 게임’은 향방을 점치기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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