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탈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탈

기사승인 2020-04-13 16:55:11

선거 안내 우편물은, 매달 오는 홈쇼핑 카탈로그와 같은 날 도착했다. 음식부터 옷과 생필품에 가전 가구의 사진까지 전부 들어있는 홈쇼핑 카탈로그와, 저마다 일 잘하고 실력 있고 나라를 확실히 바꾸고 살리겠다는 후보들의 선거공보를 함께 보는 기분은 왠지 묘했다. 두께마저 비슷한 그 우편물 중에서 내가 먼저 펼친 것은 후보 전단지였다. 더 궁금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였다. 어차피 봐봤자 누가 누군지 모를 것이 분명해 얼른 보고 덮었다. 

내게 정작 급한 것은 떨어질 때가 된 쌀과 김치라 카탈로그를 훑어보았다. 품질인증을 받은 쌀만 해도 16종류나 되고, 유명요리연구가의 김치도 수십 가지나 되었다. 문득, 고작 쌀과 김치도 이렇게 열심히 고르는데 싶어 다시 선거공고를 살폈다. 후보들은 대부분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꽤 심각한 얼굴도 보였다. 심지어 어떤 후보는 화가 난 듯 보였고, 가면처럼 짙은 화장을 한 사람도 있었다. 하나같이 번듯한 모습과 달콤하거나 단호한 수많은 약속 들 속에서 나는 과연 저것이 그 사람의 참모습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여러 모습이 같이 존재한다.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을 수만은 없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때에 맞춰 변한다. 원하든 아니든 유형, 무형의 탈을 쓰고 산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전쟁 중에 상대를 위협하느라 험한 분장을 하였고, 영국 법정에선 재판관들이 위엄을 더하느라 후광처럼 가발을 머리에 얹었다. 숲속 곤충이 자신을 가리느라 색깔을 변화시키듯, 전장에서 군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무나 바위처럼 변장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속과 겉을 달리하고, 또 누군가는 표를 얻기 위해 어제의 안면을 바꾼다. 

세상 속에서 나름의 가면을 쓰는 사람들, 그것이 싫어 무관심의 탈을 쓰는 사람들, 인생은 도처에서 생존의 탈춤 판이 벌어진다. 맨 얼굴을 찾기 어렵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살아가면서 마음과 다른 얼굴을 하기도 한다. 내가 변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먼저 변해 나를 바꾸게 만든다. 사람들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지 않고, 세상은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숨긴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었던 것이 내일은 오답이 되기도 한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말로 복잡하다. 투표용지가 거의 50센티나 된다니 시험을 치르는 기분일 것 같다. 도대체 35개나 되는 정당 중에서 경력과 공약 몇 줄에 얼굴만 보고 누굴 뽑아야 하는지. 이쯤 되면 투표는 복권용지에 행운의 번호 적는 것만큼 어렵다. 그러다 보면 나는 포기하거나 모르는 답을 찍듯 또 아무나 찍어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4년마다 한 번씩 21대까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뽑아 나라를 맡기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 생각하면, 나는 더 이상 이 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거나 욕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미래는 내가 찾은 답으로 만들어지니, 좋아도 나빠도 나로부터 기인한다.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그저 아이들을 지키고, 이웃을 돌보며 환경을 생각하는 나라다. 명절 선물세트처럼 겹겹이 포장된 탈을 벗은 정직한 세상이다. 나는 변하지 않고 기본과 원칙을 지킬 사람, 내가 신뢰를 갖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다. 정답을 찾고 싶다. 

이정화(주부/작가)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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