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봄, 남편과 나는 처음 만났다. 벚꽃축제가 한창이던 4월이었고 우리는 대학 2학년이었다. 만난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꽃이 진 자리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아래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동기들은 뜬금없는 전보를 받았고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안도의 눈물을 터뜨린 전보엔 ‘부친무사’라고 쓰여 있었다. 믿기 어려웠지만,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크기로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꽃과 젊음에 설레던 우리들은 서투른 동지처럼 광화문과 서울역에서 뭉치고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이념은커녕 의식도 없는 풋내기였지만 우리에게도 상식은 있었다.
모든 대학의 학생회에 수배령이 떨어진 날, 남편의 누나는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학교골목을 내질러 도심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서로 안 지 얼마나 된다고 위험을 같이 감수할 수 있을까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배추와 무 같은 김치꺼리 속에 숨겨온 누나의 책을 내 방에 숨겼다. 이른바 불온서적으로 찍힌 것들이었다. 지금은 대학에서 선정하는 인문고전류의 책들이었고, 최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였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때 있었더라면 그 책도 제목만으로도 불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어느 밤에는, 영문 모르는 우리 가족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내 방에 두 사람이 숨어들었다. 시간적으로 나와 남편은 남들 보기에 아직 그리 가깝지 않을 때라, 내 방은 미행의 불안 속에서도 남편과 누나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명문대 학생회장을 하는 총명하고 자랑스럽던 학생이었던 누나는 한 달여의 도피생활동안 청바지가 줄줄 흘러내리도록 말라있었다. 알량한 내 허리띠를 내준 것으로, 그해 봄의 내 기억은 끝이다. 고작 서울에서 겪은 그 5월의 어둠이다.
강점기를 겪고 해방을 하여 다시 전쟁과 휴전까지 거친 우리나라엔 ‘후일담문학’이란 특별한 장르가 있다. 그것은 불행의 역사가 세월과 함께 시들해져갈 때, 기막히게 또 등장한 80년, 광주와 그 이후의 시간을 기록한 문학이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프랑스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문학적 토대는 광주였다.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폭력에 항거하지 못하는 여자가 스스로 식물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날이후 모두 식물이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막지 못했고 밝히지 못했다. 광주가 그랬고 세월호도 그렇다. 더 멀리는 위안부문제가 그랬고, 우리가 잊었거나 모르고 지나친 수많은 시간이 그랬다.
그랬기에 ‘한강’은 맨부커상 수상소감으로 '잠든 우리나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수상시간이 한국과 유럽 간의 시차에 의해 물리적으로 한국은 잠자고 있던 때였기도 하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우리나라에 대한 중의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들 했다. 그때 나는 수상자와 달리 독자로서, 여전히 잠들어 있으나 스멀스멀 분명히 어디선가 해가 돋고 있는 우리나라에 먼저 주목한 세계에 감사했다.
2020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은 40주년을 맞았다. 고통도 40년이면 이제 더는 흔들림도 의심도 없이 불혹이 되어야 할 때다. 잔인하게도, 때로 사람은 고통 속에서 더 많이 성숙하고 고통 안에서 또 다른 은혜를 찾기도 한다. 또, 평생 고통을 안고 사는 것보단 빨리 새 날을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할 테니 인간의 망각은 어쩌면 축복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망각의 속도는 모두 다르다. 우는 사람을 보면 같이 울어 줄 수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안아줄 수도, 토닥여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억울하고 또 억울한 사람들에겐 그걸 풀어주지 않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냥 잊으라고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우린 잊었는데 왜 너는 못 잊었냐고, 우린 앞으로 나가려는데 너흰 왜 계속 뒤돌아보냐고, 그들의 멈춰버린 망각의 속도를 외면할 수가 없다.
80년 광주의 5월은 개인이나 지역의 비극이 아닌 국가의 역사이다. 그들의 어제는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어쩌면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나는 그 고통을 함께 기억하고 함께 풀어나갈 우리의 새로운 다음날을 기대한다. 그 아침이 밝고 있다.
이정화(주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