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혈통 중심 가족주의에 던진 발칙한 물음표

기사승인 2020-06-12 08:00:00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9년간 연애하던 남자친구가 3년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여자는 친언니를 찾아가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9년을 만났으면 결혼을 하든 헤어지든 하세요. 울 일 아냐”라는 차가운 말뿐. 화를 내며 돌아선 여자는 다신 언니를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당시 언니도 첫 아이를 유산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 여자는 뒤늦게 알았다. tvN 월화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의 1회 내용이다.

지난 1일 방송을 시작한 ‘가족입니다’는 ‘가족 같은 타인과 타인 같은 가족의 오해와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표방한다. 주인공 은희(한예리)의 가족은 제목 그대로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은희는 언니 은주(추자현)의 유산 사실을 몰랐고, 은주는 남편 윤태형(김태훈)이 성 소수자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막내 지우(신재하)는 은주가 아버지 상식(정진영)의 소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들 가족을 지켜보던 은희의 친구 찬혁(김지석)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의 문제가 뭔지 알아? 할 말은 안 한다는 거야.”

핏줄로 얽혔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 ‘가족입니다’는 온갖 갈등을 혈연으로 봉합해오던 가족 드라마들과는 정반대 행보를 택한다. 이 드라마 연출을 맡은 권영일 PD는 “가족을 다룬 기존 드라마가 가족의 화목이나 형제간 우애를 강요했는데, 우리는 지금 가족들의 모습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려낸다”며 “그 모습이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이겠으나, 그것을 통해 공감하고 반성하고 교감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강조하고 이를 ‘안식처’로 낭만화하던 기존의 가족 드라마 작법에서 탈피해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가족을 조명하는 시선이 흥미롭다. 

그간 한국의 홈드라마는 혈연 중심의 작품이 대부분으로,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정서로 눙치곤 했다. 일명 ‘출생의 비밀’이 홈드라마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것 역시 ‘피가 섞여야 진짜 가족’이라는 통념과 무관하지 않다. ‘가족입니다’에도 은주와 영식(조완기)처럼 ‘출생의 비밀’을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다만 이 드라마는 가족에 귀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에 초점을 맞춘 채 갈등을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여느 드라마와 차별화를 이룬다. “‘가족입니다’는 각자 다른 인물의 이야기이면서도 가족의 이야기”(김은정 작가)라는 설명이 나오는 이유다.

가족을 낯설게 보려는 시도는 스크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일 개봉한 영화 ‘침입자’(감독 손원평)는 아내를 잃은 건축가 서진(김무열)이 25년 전 헤어졌던 친동새 유진(송지효)을 집에 들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진을 ‘오빠’라고 부르며 살갑게 구는 유진과 달리 서진은 유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원작 소설 ‘아몬드’를 집필하기도 한 손원평 감독이 8년 전 딸을 출산하면서 ‘가족됨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한 게 영화와 소설의 시발점이 됐다. 102분간의 러닝타임이 끝나면 ‘집’이란 무엇인지, ‘가족’이란 무엇인지 다시 곱씹게 된다.

wild37@kukinews.com / 사진=tvN 제공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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