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도입된 지 1년 반이 넘었지만 여전히 직장 갑질 문제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는 수년이 지나도 고통 속에서 살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물론 사과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과 정책을 개선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못 잊는 직장 갑질
청와대 국민청원에 지난 9일 '간호사 태움 방지를 위한 정부의 대책 마련을 요청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9년 전 국내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던 간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원인 A씨는 "태움은 사라져야 할 악습. 이 글로 간호업계의 태움 문화 근절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 간호사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한 인격체이고 존중받으며 성장해 나갈 권리가 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A씨의 사연은 그가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9년 전 저를 죽일 듯이 태운 당시 7년 차 간호사가 간호학과 교수님이 되셨대요(간호사 태움글)'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통해 알려졌다.
A씨는 2012년 6월부터 1년간 간호선배인 B씨와 한 대학병원 응급중환자실에서 함께 일했다고 했다. 빵 썰기 등 갖은 허드렛일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중환자실 안에 갇혀서 수많은 다른 선배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폭언, 폭행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A씨는 "부모 욕, 대선에서 특정후보 뽑기를 강요하고 VRE환자에게 뽑은 가래통을 뒤집어 씌우시고 chest potable(스스로 찍으러 못가는 환자 엑스레이를 찍기 위한 기계) 오면 그 앞에 보호장비 벗고 서 있게 시키면서 '방사능 많이 맞아라~' 낄낄거리고 주문을 외시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배 간호사들을 상대로 괴롭힘을 일삼았던 B씨는 한 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로 부임했는데 이 소식을 우연히 들은 A씨 자신은 당시의 기억에 온몸이 떨렸다고 전했다. A씨에 따르면 B씨는 괴롭힌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적 대응을 예고한 상태다.
의료인 관련 커뮤니티 회원들은 A씨의 사연에 분노했다.
10년간 간호사로 일하다 퇴사했다는 C씨는 "간호사 태움은 정말 근절돼야 한다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다"고 했다. 전현직 간호사라고 밝힌 또 다른 누리꾼들도 "태움 때문에 대형병원 포기하고 지역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태움으로 치를 떨면서 퇴사했다" "그때 왜 참고 당하기만 했는지..옛 생각에 욱한다" 등 댓글을 달며 공감했다.
◇직장 갑질 금지법 사각지대…피해는 계속 늘었다
태움은 주로 간호사들 사이의 직장 갑질을 일컫는 용어로, 영혼이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직장 내 괴롭힘은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달에는 결혼을 앞둔 30대 해양경찰관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유족들은 부서 내 존재하는 태움 문화가 사망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처음 시행된 지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직장 내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법 적용 기준과 처벌조항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행법규는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회사가 신고를 이유로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행한 당사자를 처벌하는 내용이 빠진 셈이다. 신고자에게 불이익을 준 경우도 처벌 사례가 드물다.
뿐만 아니라 현행법은 피해자가 사용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도록 하게 돼 있다.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가해자가 회사 대표인 경우가 많은데 이같은 상황에선 신고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찍힐까 봐 무섭다"며 신고를 꺼리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더구나 5인 미만 사업장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파트 경비원, 골프 캐디, 학습지 교사, 방문판매원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와 프리랜서도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사용자의 가족, 고객 같은 특수관계인에 의한 괴롭힘 역시 마찬가지다.
원하청 관계의 간접고용노동자 역시 원청의 갑질에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구제받기 어렵다. 간접적으로 고용에 영향을 미치지만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의 사각지대에 피해자들이 내몰리면서 괴롭힘 사건은 오히려 법 시행 전보다 더 늘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2일 배포한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2020년 한 해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총 5823건이다. 법 시행 이후 6개월간 신고된 사건 2130건 대비 3693건 증가했다. 2020년 직장 내 괴롭힘 월평균 신고 건수 역시 2019년(355건) 대비 37% 증가한 485건에 달했다.
◇실효성 의문…법·제도 개선 목소리
물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아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현직 간호사들은 과거에 비해 태움 문화가 줄어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2~3년 전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던 간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한 뒤 의료계의 노동인권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조명됐다. 그 이후로 분위기가 이전과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에서 근무 중인 10년차 간호사 김모씨도 "전에는 정말 태움이 심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졌다"면서 "최근엔 코로나19로 일손까지 부족하다보니 후배들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간호사 유모씨는 "요새는 태움하면 외부에 다 폭로하는 시대라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다"면서 "하지만 여전히 한 부서에 몇 명정도는 (다른 직원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직장 내 괴롭힘이 여전히 존재하는 만큼 법에 존재하는 구멍을 막기 위한 개선작업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직장갑질119의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직장 내 괴롭힘 문화는 권위주의·성과주의 등 한국 사회의 복잡한 문화적 요소와 만나 만들어진다"면서 "좋은 법안만 만든다고 해서 한순간에 눈 녹듯 없어질 수 없는 이유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생기면서 과거와 달리 '막말만 해도 위법'이라는 인식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한 효과"라면서 "처벌 조항 등 법 적용의 한계를 개선하면 우리나라 조직 내 문화를 바꾸는데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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