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이었지만 생물학에 대한 관심은 도통 적었다. 그러던 내게 선배가 추천한 ‘우연과 필연'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들이다.” 서문은 강렬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초월적 존재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생명을 창조했다고 생각해왔던 정형화된 생각들은 책을 읽으며 그간의 통념을 무장해제 시켰다. 자크 모노는 모든 생명체의 출현은 분자적 차원의 미시세계에서 우연히 일어난‘변이’의 결과라고 보았다. 나이 쉰이 넘어 그의 주장이 다시금 상기되는 이유는 끊임없는 변이의 충돌들로 우리의 일상이 점철되는 광경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규명하기는 어렵지만‘변이’의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 인간 마음의 변심도 그러하고 코로나19도 다를 게 없다.
자크 모노 이 양반 참 특별하다. 분자 생물학자 중의 유일한 철학자였다. 그래서인지 분자 생물학의 토대 위에서 학술적 결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에 논거의 설득력이 강하다. 거시적인 세계에서 존재하는 생물의 유전적 형질의 특징은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발생, 불변성의 세 가지라고 명쾌하게 진단한 것이다. 경이롭다. 이 특징들에 인류사의‘우연과 필연’의 모든 대상들이 설명된다.
분자 생물학자였던 자크 모노가 자칫‘반과학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는‘인과율에 지배되지 않은 우주철학’은 생물학적 뿌리와 진화론적 관점에서 논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이든 무신론자이든 자크 모노의 주장은 과학의 경계를 넘어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성찰의 화두를 던져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돌아보면 인류는 우연성보다 필연성이 오롯하게 지배하는 세계관에 의탁해왔다. 세상의 모든 질병은 인간이 통제 가능한 것으로 오만하기도 했으며 과학문명의 발달은 모든 존재들을 필연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극단적이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인간 자신의 우연성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의 오만 앞에 환경은 언제나 가혹한 벌을 내렸다.
유전자의 분자생물학적 분석을 통해 인류의 출현이 우연적 사건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자크 모노의 주장은 종교계의 눈 밖에 났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인간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라는 유럽 기독교 정통 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한 오래된 교리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나 자크 모노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문명은 비판적 사고에서 진화한다.
그 누구도 예측 못했던 코로나19의 습격, 그리고 우왕좌왕했던 인류에게 자크 모노는 속박당한 필연으로부터의 탈출을 조언한다. 코로나19의 숙주 동물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간과 동물의 우연한 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필연으로 귀결시킨 것은 인류의 환경파괴라는 필연적 잘못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인 류시화는 대양은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기에 ‘바다’라고 하였다. 지구상 가장 진화한 종이라는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이 아닌 독식에 의해 직면한 팬데믹, 우연이었지만 필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