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소시민은 항상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도전욕구를 자극하는 이 문장은 일본 출신 메이저리거 노모 히데오가 한 말로 잘 알려져 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4년간 메이저리거로 활약한 히데오는 동양인 투수 최다승 2위(123승, 1위는 124승의 박찬호)이라는 값진 결실을 만들기도 했다. 온갖 역경에도 포기를 모르고 계속해서 도전을 선택한 그의 행보로 인해, ‘소시민’ 발언은 진위 여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히데오를 대표하는 문장이 됐다. 이 발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슈퍼스타를 ‘리스펙(존중)’하는 의미로 스포츠계에서 자주 사용된다.
지난달 30~31일 2021 ‘LoL 월드챔피언십(롤드컵)’ 4강전 일정이 모두 마무리됐다. 디펜딩 챔피언 담원 게이밍 기아는 절정의 폼을 과시하던 T1을 상대로 풀세트 접전 끝에 세트 스코어 3대 2 승리를 거뒀다. LPL(중국 프로리그) 1시드 에드워드 게이밍(EDG)은 젠지 e스포츠를 3대 2로 제압하고, 팀 창단 최초로 롤드컵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모든 경기가 풀세트로 진행됐을 정도로 4강전은 매우 팽팽하게 진행됐다. 패배한 팀이 못한 것이 아니라 승리 팀이 조금 더 잘했다. 경기가 끝난 직후 대다수의 e스포츠 시청자들은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격려를 보냈다.
하지만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패배한 선수들을 조롱하는 글이 커뮤니티에 올라왔고, 팬들 역시 서로를 물어뜯으며 상대 팀 선수를 비하하기 시작했다. 실력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원색적인 인신공격도 찾아볼 수 있었다.
T1의 미드 라이너 ‘페이커’ 이상혁 역시 4강이 끝난 후 비난의 대상이 됐다. 담원 기아와의 경기에서 이상혁은 2·3세트 준수한 모습을 보이며 승리에 기여했지만, 4세트에는 상대의 집중공세에 말려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5세트 승부처에서는 ‘쇼메이커’ 허수의 노림수에 당해 다소 허무하게 전사하기도 했다.
경기 후 몇몇 대형 커뮤니티에서는 “페이커는 LoL e스포츠가 상향평준화되지 않은 시기에 데뷔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며 “후배들을 위해 은퇴도 고려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젠지 e스포츠의 원거리 딜러 ‘룰러’ 박재혁에게도 비슷한 비난이 이어졌다. 젠지는 EDG의 ‘루시안’-‘나미’ 조합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이는 패배의 단초가 됐다. 곧바로 박재혁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젠지가 바뀌려면 룰러를 내쳐야 한다”는 폄하발언도 있었다.
선수들에게 과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지적한 이들도 있었지만, 곧바로 “기성 스포츠에 비하면 이정도 비판은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라며 “e스포츠도 스포츠인데 팬들의 정당한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는 반박이 대거 나왔다.정당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다. 자유로운 토론이 활발히 진행된다면, e스포츠 시청층이 확대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야구와 축구 등 전통스포츠에서도 이미 증명된 사례다.
하지만 비판이 아닌 원색적인 비난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수많은 선수들이 악의적인 비난과 조롱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한 ‘LoL 챔피언스코리아(LCK)’ 구단 관계자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의 향한 악성 댓글과 비난을 일일이 확인한다”며 “안 좋은 반응을 계속 보다보면 선수 기량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e스포츠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성숙한 팬 문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이번 2021 롤드컵이 LCK 입장에서는 역대급 축제가 될 수 있음에도 반목과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롤드컵에는 담원 기아, T1, 젠지까지 한국 팀 3팀이 4강에 진출했다. LCK 소속 3개 팀이 롤드컵 4강에 동시에 진출한 것은 2016년 이후 5년만이다. 여기에 한화생명e스포츠를 포함한다면 올해 LCK는 메이저 지역 최초로 4개 팀이 8강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축제를 즐길 시간이 아까운데, 선수들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과 공격적인 모습이 e스포츠 팬 문화에도 뿌리내린 것 같아 우려를 자아낸다.
이상혁과 박재혁은 LCK를 세계 최고의 리그로 만드는데 일조한 ‘리빙 레전드’다. 두 베테랑은 비록 전성기 당시의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여전히 전세계 최정상급의 실력을 뿜어내고 있다. 정점을 찍어봤던 두 사람은 지금도 새로운 목표를 위해 도전하고 있다.
담원 기아와의 혈투 끝에 아쉽게 패한 이상혁은 공동 인터뷰에서 “팀원들이 생각보다 더 잘해줘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면서 “내가 중간에 집중력을 잃은 것이 아쉬움으론 남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시즌은 끝났지만 최근 조금씩 운동을 하고 있다”며 “남은 기간 동안 운동을 열심히 해서 좋은 컨디션으로 내년에도 좋은 모험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박재혁 또한 EDG와의 경기 이후 “첫 번째 판, 초반 갱에 힘을 많이 썼는데 거기서 죽은 게 되게 컸다”며 “내가 겁먹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에서도 후퇴하면서 어려워졌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며 자신의 실수를 오랫동안 곱씹었다. 2년 남짓의 LCK 취재 과정에서 지켜본 바로 박재혁은 이글거리는 승부욕이 눈에 보일 정도로 뜨거운 선수다. 이번 패배를 발판삼아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줄거라 확신한다.
기성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e스포츠에서도 에이징 커브가 존재한다. 특히 찰나의 순간을 좌우하는 판단과 피지컬이 매우 중요한 e스포츠 선수들은 20대 중반부터 에이징 커브를 맞닥뜨리는 사례가 많다. 각각 데뷔 9년차·6년차를 맞이한 이상혁과 박재혁에게 기복 없는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다.
다만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빌 샹클리 리버풀 전 감독의 격언처럼 두 베테랑이 만들어낸 성과는 영원히 역사에 남는다. 현재 다소 부진한다 해서 그들의 업적까지 부정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들을 응원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전하는 이들의 노력을 비웃는 소시민이 되지는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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