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돌인터뷰는 과몰입 상태를 빠져나오지 못한 기자가 작품을 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 쿠키뉴스의 코너입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드라마는 끝나고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고요. ‘새피엔딩’의 신기원을 제시한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이 남긴 여운은 지금도 여전히 뜨겁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명장면의 뒷이야기들을 정지인 감독에게 직접 들어보세요.
- 3회에서 덕임(이세영)은 연못에 비친 모습을 보며 이산(이준호)의 정체를 눈치챕니다. 두 사람은 1회 마무리에서 함께 연못에 빠지며 처음으로 만나죠. 연못 위 다리에서 고뇌하는 인물들도 눈에 띕니다. 연못이 주 무대가 된 이유가 있을까요?
“현대극과 다르게 사극은 자연 속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어요. 물에 빠지는 극적인 상황을 구현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물 반사를 이용한 장면들로 덕임과 산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려 했어요. 자연광이 좋은 날에는 특히나 더 좋은 장면을 담아낼 수 있었어요.”
- 덕임과 산이 시경을 낭독하는 5회 엔딩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림자로 둘을 표현한 부분과 영·정조의 대립, 덕임이 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부분 모두 명장면으로 꼽히는데요. 이 장면들의 비하인드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에요. 드라마 전개상으로도, 산과 덕임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죠. 동궁 처소 세트가 완성되자마자 두 사람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했어요.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에게 그림자를 이용한 투 샷을 꼭 찍겠다고 말했죠. 비교적 초반에 이뤄진 촬영이어서 조명과 촬영장비 세팅에 오랜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점심 먹고 리허설을 시작해 새벽 1시가 꼬박 넘어서야 촬영이 끝났을 정도예요. 설렘부터 분노와 당혹감, 충심, 연심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배우 모두가 훌륭히 소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 극 초반 산과 덕임이 감정을 나누던 서고도 인상 깊은 장소예요.
“생각시와 가짜 겸사서가 서고에서 나누는 풋풋한 시간은 산과 덕임의 시작이기도 해요. 배우들과 동선을 상세히 짜며 많은 공을 들였어요. 둘의 감정선에 따라 서고 가운데에서 동전을 던지는 상황부터 창가 앞에서 덕임이 어떻게 앉을지 계산해가며 촬영했죠. 두 배우가 소금과 먼지를 뒤집어쓰며 열연해준 덕에 풋사랑의 시작이 된 장면들이 탄생했어요. 현장에서 즉석으로 연기를 요구해도 노력하는 배우들을 보며 앞으로의 촬영을 더 기대하게 됐죠.”
- 배우들이 체형 관리도 꾸준히 했다고 들었어요.
“이준호는 늘 몸가짐에 신경 썼어요. 타고난 왕의 위엄을 위해 매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죠. 촬영이 마무리될 때까지 식단도 관리했어요. 치킨 이야기를 자주 해서 치킨 쿠폰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사용했을지 의문이에요.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예민한 외형의 이산을 유지해주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어요. 이세영은 덕임의 생각시 시절부터 후궁까지를 표현해야 해서 살을 좀 찌우면 좋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무더위 때문에 살이 점점 빠지더라고요. 날씨가 선선해지고 기운을 차려 다행이었어요. 촬영 현장에 간식 바구니가 있었어요. 세영 씨는 바구니 속 과자와 젤리를 꼬박꼬박 먹었지만, 준호 씨는 7개월 내내 구경만 하다가 젤리만 두 번 가져가던 기억이 나요.”
- 광한궁 설정은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어요.
“광한궁은 초반 기획 단계부터 있던 설정이에요. 극 전개상 필요한 장면이었죠. 원작에서 은막에 가려졌던 제조상궁을 전면에 가져오려 했어요. 산에게 영조가 최대의 정적이라면 덕임에게는 제조상궁 조씨가 그런 존재라 생각했거든요. 궁녀로서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대본 속 광한궁은 지하의 음습한 공간이었지만 예산과 시간상 기존에 있던 세트를 활용하게 됐어요. 이미 지어진 세트여서 생각했던 것에 비해 더 크게 표현됐어요. 광한궁 일원인 궁녀 월혜는 실존인물인 강월혜가 정조의 암살 시도에 가담했다는 기록을 참고해서 만든 캐릭터예요. 호불호가 갈리는 설정이어도 극적 상상력으로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설정을 어떻게 연출했어야 할지 고민은 남아요. 로맨스가 줄어 아쉽다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돼요.”
- 산, 덕임 외에도 많은 배우가 ‘옷소매 붉은 끝동’에 함께했어요. 캐스팅과 비하인드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이덕화는 제가 그리려는 영조 자체였어요. 본능적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분이셨죠. 5회에서 이산을 몰아세우는 부분과 11, 12회 편전 장면은 이덕화의 영조가 아니었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거예요. 제작발표회에서 제게 진정성 있는 감독이라고 해주셨는데, 선생님이야말로 진정성 중의 진정성을 보여준 연기자셨어요.”
“강훈은 원래 덕임 오빠 성식을 맡을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부드러운 느낌과 서늘한 눈빛이 공존하는 걸 보고 홍덕로 역을 제안했죠. 날렵한 미남 느낌을 살리기 위해 체중 감량도 부탁했어요. 홍국영이 정조에게 충성심을 보인 기록과 정철의 ‘속미인곡’·‘사미인곡’을 보라고도 했죠. 이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담으려 했어요.”
“박지영은 카리스마와 왕을 향한 애증을 모두 녹여낸, 최고의 캐스팅이에요. 궁녀 역할을 제안받은 건 처음이래요. 어떤 감독인지 궁금했다며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 새삼 반했죠. 사극을 처음 해보는 감독과 후배 연기자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돼주셨어요.”
“장희진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졌어요. 기존 작품에서 보지 못한 정순왕후를 기대하게 됐죠. 긴장감 있는 장면을 연기할 때면 어디서 찬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어요.”
“서상궁 캐릭터를 보자마자 장혜진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덕임을 따뜻하게 감싸주면서도 생활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란 확신이 들었죠. 배우의 매력이 캐릭터에 녹았어요. 긴 촬영 기간 동안 저 역시도 많이 의지했어요.”
“오대환이 맡은 좌익위 강태호는 원작에 없는 창작 인물이에요. 대사가 없는 상황에도 뭔가를 만들어 오고 드라마 상황에 맞게 소화했어요. 감독으로서 언제나 기대하게 되는 배우예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고 강말금과 꼭 작업해보고 싶었어요. 색다른 혜경궁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죠. ‘한중록’을 읽고 따로 감상평까지 보내주더라고요. 기록 속에서 찾아낸 혜경궁의 서늘하고 목적 지향적인 모습을 담으려 했어요. 무방비하게 나오는 날것의 얼굴에 늘 감탄했어요.”
“이민지, 하율리, 이은샘 등 궁녀즈는 원작에 충실히 캐스팅했어요. 이들과 촬영할 땐 리허설부터 웃다가 힘이 빠질 정도였어요. 궁녀즈 덕에 덕임이가 과거의 덕임에게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 더 뭉클하게 느껴졌어요. 배우들에게 울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사실 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어요. 즐겁고 뭉클한 기억이 많은 현장이었습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