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하고 튀자”…무너진 청년 마도로스의 꿈 [해기사 인력난]

“3시하고 튀자”…무너진 청년 마도로스의 꿈 [해기사 인력난]

기사승인 2023-09-04 08:31:22
실습하던 중 항해하던 바다에서 찍은 사진. 독자 제공

“3시하고 튀자.”

해양대학교 해사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이 있다. 3시하고 튀자. ‘3시’란 ‘3년 시마이’의 줄임말이다. 남학생의 경우, 병역특례가 인정되는 최소기간인 3년만 배를 타고 하선하는 것을 뜻한다. 선원의 꿈을 안고 배를 탄 해사대학교 학생들은 왜 ‘3시하고 튈’ 마음을 먹었을까.

정식 선원이 되기 위해선 ‘선원 훈련에 관한 국제협약(STCW)’에 따라 최소 1년간 배에서 실습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해사고나 해양대 학생들은 보통 학교에서 운영하는 선박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는다. 나머지 기간은 해운회사 외항선에 올라 실습을 한다. 이 기간에 해양대 학생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해양대학교에 재학 중인 박성훈(23.가명)씨는 지난해 3월 배에 올랐다. 승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술을 잔뜩 마신 선장이 박씨를 브릿지(선박 내 조종실)로 불러냈다. “선장이 저에게 실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자기 인맥을 동원해서 이 회사를 못 오게 만들겠다, 라고 말하더라고요. 농담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안 됐어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으름장을 놓은 건지, 아님 진심으로 협박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열심히 하겠다고 대답하고 내려왔는데, 진짜 그렇게 될까봐 무서웠죠.” 

이후로도 선장이나 상급 항해사는 박씨에게 묘하게 면박을 줬다. 웃으면서 “야, 넌 내가 본 실항사(실습 항해사의 줄임말) 중에 일을 제일 못 한다. 똑바로 해라”라고 하거나, 장난처럼 뒤통수를 치면서 말을 거는 날도 많았다. 박씨는 기분이 나빴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박씨는 실습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싶었다. 선내 문화에 적응하고 규율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합리화를 했죠. 구타를 당하거나 심한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니니 이 정도면 괜찮다고요. 제가 한참 아랫 직급이니까 이 정도 이야기는 들을 수 있다고 저 자신을 세뇌했어요. 실제로 캡틴도 가끔 그러는 것을 빼면 저한테 꽤 잘 해주셨거든요.”

“배에서 내리고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런 문화에 적응하는 제가 낯설었습니다. 나중에, 저도 후배들에게 그럴 것 같아서 무서워지더라고요. 저도 결국 3시하고 튈 생각을 하고 있네요.”

픽사베이

바다 위의 무법지대

김지원(가명·여·24)씨는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선원이 되고 싶어 해사대학교에 입학해 지난 2021년 컨테이너선에 올랐다. 회식이 있었던 날 밤, 자리를 정리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술에 취한 1항사(1등 항해사의 줄임말)가 김씨의 방에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대뜸 저를 끌어안더라고요. 너무 당황했는데 화를 낼 수는 없었어요. 캡틴한테 이야기를 해 볼까 계속 고민했는데, 하선까지 3개월 넘게 남은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신고한 상태로 남은 시간동안 계속 1항사를 계속 봐야 한다는 게 너무 큰 부담이었어요. 괜히 문제를 일으키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결국 신고도 못하고 남은 기간을 버텼습니다.”

이후에도 그 1항사는 “너는 나이 들면 살찌기 딱 좋은 체형이다. 지금부터 관리 똑바로 해라”고 말하는 등 다른 사람 앞에서 외모 평가를 서슴없이 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와하하 웃었다. 아무도 그 사람이 무례했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6개월간 실습이 끝나고 배에서 내린 날, 김씨는 선원의 꿈을 접었다.

“실습생 신분으로 부당한 행위를 신고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나중에 취직할 때 문제가 될까봐 걱정이고… 내가 할 줄 아는 것도 많이 없는데 잡음만 내는 것 같아서 위축되고요. 주변에도 실습할 때 성희롱이나 언어 폭력을 많이 경험한 친구들이 꽤 많아요. 저랑 비슷한 이유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뿐이죠.” 

부당한 일을 겪고도 혼자 삭혀야 하는 실습생의 고충은 이뿐이 아니다. 회사는 실항사와 실기사에게 실습비 명목으로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컨테이너 선에서 실습을 했던 양석호(23.가명)씨는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 하루 평균 8~9시간씩 근무했다. 당직이 끼어 있으면 12시간 근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배를 타는 것부터 처음 해보는 선내 업무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게다가 업무량이 많아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었지만 열심히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양씨는 일주일에 평균 72시간에서 많게는 80시간까지 일을 했다. 근로기준법에 의한 최저임금을 적용받았다면 약 277만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습 기간 동안 양씨가 받은 임금은 월 280달러, 한화로 약 37만원이다. 

턱없이 모자란 실습비 문제는 이전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회사가 실습비를 턱없이 낮게 줄 수 있는 이유는 학생들이 근로기준법이 아닌 선원법을 일부 적용받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어진 관행으로 굳어져 문제삼는 사람도 없다. 양씨는 “(실습비가)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며 “일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심하연 기자 sim@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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