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여제’ 등극한 천재소녀 김은지 스토리

‘바둑 여제’ 등극한 천재소녀 김은지 스토리

2007년생 김은지 9단, 최정 9단 꺾고 여자기성전 우승
역대 최연소, 최단 기간 입신(프로 9단) 등극 신화
‘천재 소녀’ 관심부터 ‘AI 치팅 파동’까지 굴곡 많은 스토리

기사승인 2023-12-20 16:46:23
김은지 9단이 최정 9단을 꺾고 한국 여자 바둑 최대 기전 해성 여자기성전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은 난설헌배 우승을 차지한 김 9단이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습. 한국기원

10년 넘게 여자 바둑 최정상 자리를 지켜온 최정 9단 목에 방울을 단 기사는 거의 띠동갑에 가까운 나이 차이를 보이는 신예 기사 김은지 9단이었다. 최 9단은 1996년생, 김 9단은 2007년생으로 11살의 나이 차이가 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이 있다. 바둑계에선 김은지 9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다. 김은지는 다섯 살 무렵이던 2012년부터 어린이 바둑대회에 출전하며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이른 시기부터 언론도 주목했다. 김은지는 SBS에서 방영한 ‘영재 발굴단’ 초창기 무렵인 2015년 설특집 방송으로 매스컴을 탔다. 

그러나 ‘천재 소녀’라는 세간의 관심이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김은지는 예상보다 늦은 2020년에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다소 늦게 느껴지는 것일 뿐, 입단 당시엔 ‘최연소 프로기사’ 타이틀을 꿰찰 정도로 빠른 프로 데뷔였다.

新 여제로 등극한 김은지 9단. 한국기원

프로가 된 해에 바로 2단으로 승단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김은지는 바둑 뉴스가 아니라 사회면에서까지 주목 받게 된다. 좋은 이슈가 아니었다. 당시 체스 등 다른 분야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고 있던 ‘인공지능 치팅’ 문제가 터진 것이다.

2020년 9월 29일 한 온라인 바둑대회에 출전한 김은지는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다음 착점을 검토한 후 대국하는 실수를 범한다.

여전히 선수라는 호칭보다는 ‘프로기사’, ‘전문기사’ 등으로 불리며 바둑 팬들로부터 ‘사범님’이라는 존칭을 받는 바둑 프로들은 AI가 범람하고 있던 이때까지도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기반이었다. 누군가 의혹을 제기해도 ‘프로기사가 그럴 리 없다’고 일축하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김은지의 착점들이 이상할 정도로 인공지능 일치율이 높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많은 프로기사들이 적극 나서서 김은지를 변호했다. ‘그랬을 리가 없다’는 일종의 맹목적 믿음이었다. 

인공지능 전문가 등이 참여한 정밀 조사 끝에 한국기원 징계위원회를 통해 ‘자격정지 1년’ 징계를 받은 김은지는 2022년 복귀 시점에서 여자바둑리그 최연소 주장으로 돌아왔다. 바둑계 복귀 이후 첫 번째 인터뷰 자리에서 “잘못된 행동을 반성한다”고 팬들에게 사과한 김은지는 각종 논란과 시련을 딛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김은지 9단의 해성 여자기성전 결승 최종국 착점 모습. 최정 9단을 넘고 ‘김은지 시대’ 개막을 알렸다. 한국기원

2022년 복귀 이후 김은지 9단의 행보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IBK기업은행배 여자바둑마스터스 준결승에 진출했고 남자 기사도 모두 출전하는 이붕배 신예 최고위전 본선 16강에도 이름을 올렸다. 난설헌배와 효림배 등 여자 기전 우승을 차지했고, 최정 9단과 본격적인 결승 승부를 펼친 제6기 해성 여자기성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최정 9단의 벽을 느낀 결승전 패배가 있었지만 당시 분위기는 고무적이었다. 관록과 노련미에 앞선 최 9단이 승부에선 이겼지만 내용 면에선 신예의 거센 도전에 힘겨워하는 느낌이 역력했던 것이다. 박력 넘치는 김은지 9단의 공격에 당황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김은지 9단은 지난 19일 밤 10시를 넘긴 시각 드디어 프로 입단 전부터 꿈에 그리던 목표 최정 9단을 넘어서고 한국 여자 바둑 최대 기전인 여자기상전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결승 1국을 내줬지만 2국에서 완승으로 반격, 최종 3국도 승부처에서 멈칫한 최정 9단과 달리 김은지 9단의 신예 답지 않은 대담함이 빛났다.

김 9단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최정 9단에게 이겨 우승했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고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한국 여자 바둑계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최근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최정 9단이 전성 시대를 여는 역할을 했다면 김은지 9단은 이를 더욱 탄탄하게 받쳐줄 새로운 에이스의 면모를 보인다.

기업들의 여자 바둑 후원도 속속 이어진다. 마치 KPGA와 LPGA를 보는 듯한 느낌인데, NH농협은행이 시니어바둑리그를 후원하다 여자바둑리그 타이틀 스폰서로 선회한 것, IBK기업은행배 창설, 효림배, 뉴스핌배 여자바둑최강전 등 여자 프로 선수를 위한 무대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한국 여자 바둑을 정복한 김은지 9단의 시선은 이제 세계 무대로 향한다.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절치부심할 최정 9단, 세계 여자 대회 타이틀을 노리는 김은지 9단이 격돌할 2024년 세계 여자 바둑대회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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