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가 5일 SNS에 자필편지를 올려 팬들에게 사과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서가 아니다. 그는 지난달 27일 이재욱과 교제를 시작했다고 인정했다. 온라인 언론사 디스패치가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도해 열애설이 불거진 직후에다. 에스파는 올해 첫 정규음반 발매를 앞둔 상태. 팬들은 ‘중요한 컴백을 앞두고 마스크 없이 데이트한 카리나에게 실망했다’는 성토를 쏟아냈다.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왜 팬을 배신하기로 했냐’는 문구를 단 트럭이 오갔다. 카리나가 “팬들이 상처받은 부분을 잘 메워 나가고 싶다”며 사과한 배경이다.
K팝 시장에서 인기 가수의 교제 사실이 알려진 후 팬들이 등을 돌린 역사는 유구하다. 인기 가수의 열애설 상대에게 면도칼 등을 보내던 1990년대 팬덤 문화가 2020년대 들어 트럭 시위와 보이콧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6일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열애설을 접한 팬들은 일종의 배신감과 허탈함을 느끼는 것 같다. 팬사인회 응모 등 팬 활동에 드는 비용이 커지면서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에 과하게 몰입하는 팬들이 생기는 듯하다”고 짚으면서 “가수는 자신 때문에 팀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면 더 위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K팝의 ‘웃픈’ 사과문은 올해만 벌써 세 번째다. 그룹 템페스트 멤버 화랑은 지난달 팬사인회에서 ‘클럽에서 화랑을 봤다’는 팬의 말에 “음악이 좋아서”라고 답했다가 클럽 방문을 인정했다며 질타받았다. 그는 당시 대화에서 “나쁜 짓 안 했다”고도 했지만, 팬들의 반발이 커지자 소속사를 통해 사과했다. 그룹 뉴진스 멤버 민지는 지난해 웹예능에 출연해 “칼국수가 뭐지”라고 혼잣말했다가 1년 넘게 온라인 괴롭힘에 시달렸다. 올해 초 SNS 방송에서 “여러분, 제가 칼국수를 모르겠어요?”라고 가볍게 응수한 뒤에는 ‘태도가 불량하다’ ‘멤버들과 사이가 나빠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그는 지난달 “제 말투와 태도가 보시는 분들께 불편함을 드렸다”며 사과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소비자로서 돈을 썼다고 해서 가수의 사생활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일부 팬들의 믿음은 잘못됐다”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연예인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면서 소속 연예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K팝 시스템의 결함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짚었다. 기획사가 소속 연예인과의 정서적 친밀감마저 소비재로 판매하면서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해결엔 소극적이라는 진단이다. 버블 등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팬들은 지불한 비용만큼 메시지를 받길 바라지만, 가수는 공사 구분이 희미한 상태로 감정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김 평론가는 “연예인의 모든 활동을 수익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손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문제”라며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어떻게 K팝 산업이 유지될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