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행위별 수가제’에서 ‘가치 기반 지불제’ 중심으로 건강보험 수가제도를 개편할 계획인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지불체계를 가치 기반 의료로 전환하는 방향성은 바람직하지만, 의료현장에 정착하기까지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칫 진료 난이도가 높은 환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여러 사회적 논의와 실증적 평가를 거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의료계에 따르면 정부는 현행 건강보험 보상체계에서 93% 정도를 차지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가치 기반 지불제로 일부 대체·조정해나갈 방침이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 재정 내 별도의 계정을 두고 총 요양급여비용의 2% 수준인 약 2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영상·검사 분야 등에 대한 상대가치 점수 산정 절차와 방식도 손본다.
보건복지부는 행위별 수가를 산정하는 상대가치 점수를 개편하기 위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안에 정부, 전문가, 의료계가 참여하는 의료비용분석위원회를 꾸린 상태다. 올 상반기 중 준비를 거쳐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한다.
행위별 수가제란 진찰료, 검사료, 처치료, 입원료, 약값 등 모든 개별 의료행위마다 단가를 정해 건강보험 재정으로 지불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지불의 정확도가 높은 장점이 있지만, 행위량을 늘릴수록 수익이 생기는 구조 탓에 이른바 ‘3분 진료’나 과잉 진료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 치료에 필요한 자원의 소모량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오랜 기간 경험을 쌓은 의료인의 행위보다는 장비를 사용하는 검사에 대한 보상이 커져 불평등이 생겼다. 반면 가치 기반 지불제는 진료 적정 여부 등을 살펴 의료진의 성과와 가치 중심으로 수가를 지급한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지난 18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정례브리핑에서 “행위별 수가제를 유지하면 늘어나는 고령화의 의료비 지출을 감당해 내기가 어렵다”며 “‘국민의 건강 회복’이라는 의료서비스의 목적에 중점을 둔 가치 기반 지불제로 혁신해 나가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겠다”고 말했다.
‘가치 있는 의료’ 기준 설정부터 난항
가치 기반 지불제의 핵심은 가치 있는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문제는 ‘가치 있는 의료’를 어떤 기준으로 구분 짓고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점수를 매기냐는 것이다. 가치 기반 지불제를 우리보다 먼저 도입한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도 정착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여러 논란과 문제를 빚었다. 미국의 경우 지난 2003년부터 메디케어 입원 환자에 대한 의료 서비스의 질 향상과 비용 절감을 위해 가치 기반 지불제를 도입했는데 아직 완전히 정착시키지는 못했다.
전문가들은 가치 기반 지불제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양날의 검’ 같은 지불제도라며 도입 검토 단계부터 난항을 겪을 것이라고 짚었다.
정재훈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가치 기반 지불제를 우리 의료체계에 적용할 수 있을지부터 면밀히 검토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 교수는 “수술할 때 드는 비용이 100만원이라고 치면 수술이 잘 됐을 때 10만원을 더한 110만원을 주는 게 가치 기반 지불제의 개념”이라며 “치료가 어려운 환자를 받아서 살리는 것과 쉬운 환자를 받아서 살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똑같은 일인데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측정해서 인센티브를 줄 것인가를 정하는 게 어렵다. 자칫 진료 난이도가 높은 환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가치 기반 지불제가 목적 자체는 굉장히 좋아 보이고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지불제도를 가치 기반 지불제로 100%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떨어진다”며 “미국의 경우 의료와 보험이 민간에서 운영되며 국민들의 의료 선택권이 거의 무한대로 보장되고, 각 병원들의 수술 성적표가 투명하게 공개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의료’를 측정하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소아청소년과나 산부인과 등 초저출산으로 인해 환자가 점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진료과는 행위별 수가제 대신 다른 지불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했다. 정 교수는 “행위별 수가제로 보전을 못 해주는 진료 영역이 생길 텐데 다른 보상 방식을 검토·적용해야 한다”면서 “그게 가치 기반 지불제가 될 수 있고, 달빛어린이병원처럼 환자가 없어도 지역에서 유지되도록 비용을 보전하는 방법이 있다”고 전했다.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도 “소청과나 산부인과 등 필수과는 환자가 없어도 병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행위별 수가체계 안에서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아 힘들다”며 “가치 기반 지불제 등 다른 수가제도를 도입해 95%에 달하는 행위별 수가제 비중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보험 재정 당국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가치 기반 지불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미국의 일차의료 혁신모델 운영기관을 방문해 지불제도나 종사자 교육 등을 벤치마킹하는 등 지역 기반 환자 중심 일차의료 모형을 고도화하고 있다”며 “치료 과정과 성과에 따라 보상하는 지불 방식의 확대를 위해 지역 자원 연계, 일차의료기관 간 네트워크 형성 등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지불제도 개선을 위한 자료조사 및 기초연구를 추진하는 등 정부의 건강보험 정책을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