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육아 병행? 포기했다”…사각지대 갇힌 한국 부부들 [380조의 늪①]

“일·육아 병행? 포기했다”…사각지대 갇힌 한국 부부들 [380조의 늪①]

‘일·가정 양립의 실현’ 정책 주목
기업 간 육아휴직 활용 격차
자영업자·비정규직도 ‘그림의 떡’
“사회 구조를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할 때”

기사승인 2024-08-12 06:05:03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무기계약직 조모(여·35)씨는 최근 아이를 낳으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이미 출산휴가를 쓴 만큼 육아휴직까지 쓰긴 부담스러웠다. 동료의 업무부담이 늘어날까 눈치가 보였다. 상사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계속 일하기 어렵지 않겠냐’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결국 2년마다 갱신하는 재계약을 포기했다. 조씨는 “무기계약직에게 육아휴직은 사용 전 협의도 쉽지 않지만, 복귀 후도 문제”라며 “그나마 퇴직금과 실업급여라도 받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조씨와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권모(남·37)씨는“대기업이 아니고선 남자 출산휴가는 꿈도 못 꾼다. 나도 회사 사정상 출산휴가를 3일밖에 쓰지 못했다”며 “주4일제, 단축근무 등이 육아를 하는 가정에서는 절실하다”고 했다. 자녀 1명을 가진 최모(여·32)씨는 “회사에선 ‘둘째, 셋째까지 혜택을 볼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쿠키뉴스가 지난 12일 출산자들을 대상으로 저출산 정책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육아휴직 제도를 확대·개선해야 한다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전문가도 저출생 문제의 핵심으로 ‘일·가정 양립의 실현’을 지목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서구와 달리 바람직한 일·가정 양립 롤모델이 없다”며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저출산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국민 여론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12월 열린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정책 토론회에서 ‘일과 육아 병행이 어려운 사회구조’가 저출산의 주요 원인으로 발표됐다. 

일·가정 양립 지원 정책은 육아휴직 사용, 돌봄 환경 강화, 경력 단절 해소 등을 골자로 한다. 주로 일하는 여성이 지원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정책도 포함되고 있다.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정부도 일·가정 양립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하지만 주로 청년 및 결혼 지원에 중점을 두었고, 육아 지원에는 미흡했다. 문재인 정부는 저출산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하며 3차 기본계획 목표를 수정하고 청년 일자리와 주거지원을 대거 포함시켰다. 새로 수립된 4차 기본계획은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 조성’을 목표로 삼아 부부 육아휴직 급여 인상과 육아기 노동시간 단축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급격히 하락하는 출산율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실적으로 제도 활용의 문턱이 여전히 높고, 기업별 격차 등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2022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5038곳 중 20.4%는 ‘육아휴직이 필요한 사람도 전혀 사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5곳 중 1곳은 육아휴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기업 간 육아휴직 활용 격차도 컸다. 대기업(300인 이상 사업체)의 경우 95.1%가 ‘육아휴직이 필요하면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답한 반면, 5~9인 사업체는 47.8%로 절반 수준에 그쳤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대체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특정 직원에게 업무가 몰리기 때문에 육아휴직 사용이 어렵다. 낮은 소득대체율(통상임금의 80%)과 경제적 문제도 높은 장벽으로 작용한다.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상황은 더욱 나쁘다. 우리나라의 출산·육아휴직 제도는 임금근로자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영세 사업장의 자영업자는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비정규직 종사자에게도 육아휴직은 ‘그림의 떡’이다. 민주노총의 ‘남성 노동자의 육아휴직 사용 격차와 차별’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가 비정규직이거나 무기계약직인 경우 13.4%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 부모가 모두 정규직인 경우는 57.2%로 절반을 웃돌았다.

전문가들은 더 과감한 변혁을 주문했다. 정재훈 교수는 “현재의 저출생 기조가 지속된다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일·가정 양립이 가능하도록 사회 구조를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의 사회적 돌봄 체계 마련과 △가족 친화적인 기업 문화 조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늘봄학교, 유보통합(교육시설인 유치원과 보육시설인 어린이집의 통합) 등 정부 주도 대책이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가정 균형을 위한 중·장기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저출산 대응 정책들이 부처별로 흩어져 있어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에서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저출산 현상은 정책의 큰 틀을 세우고, 이에 기반한 세부 정책이 나와야 한다”며 “국민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인구정책의 초점을 수정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승은 기자, 최은희 기자, 권혜진 기자
selee2312@kukinews.com
이승은 기자
최은희 기자
권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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