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장고 끝에 내년 도입 예정이었던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방침을 밝혔다. 당초 ‘유예’ 입장을 보인 이 대표가 ‘폐지’로 입장을 급선회한 것은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중도 외연 확장의 일환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대표는 최근 보수 원로를 연달아 만난 것에 이어 재계·종교계 인사와 만남을 가지며 연일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5일 정치권에 따르면 민주당은 금투세 폐지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이 대표는 전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원칙과 가치에 따르면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강행하는 것이 맞겠지만 현재 주식 시장이 너무 어렵다”며 “아쉽지만 정부·여당이 밀어붙이는 금투세 폐지에 동의하기로 했다”고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이 대표는 지난 전당대회 기간 금투세 유예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대표가 쏘아 올린 유예론으로 인해 당내에서는 시행, 보완·시행, 유예, 폐지 등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정부·여당의 금투세 폐지 압박 속 팽팽한 찬반 토론 끝에 민주당은 이 대표에게 공을 돌리며, ‘유예’에 무게가 실리는 듯했다.
이 대표가 ‘폐지’ 카드를 꺼낸 배경에는 금투세 시행이 국내 ‘개미 투자자’에 미칠 영향과 현재 이들의 부정 여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부 투자자들은 금투세에 대해 ‘재명세’라고 부르며 강한 반발을 보였다. 이 대표는 스스로 자신의 결단을 밝히며 “1500만 주식 투자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윤덕 사무총장은 “금투세 폐지 동의는 민생을 위한 결정”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유예나 보완 후 시행 등을 선택했을 경우 정부·여당에 공세 빌미만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정략적 판단도 있다. 이 대표는 “정부·여당이 정책을 갖고 야당을 공격하는 정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금투세 도입을 유예하거나 보완 후 시행하겠다고 하면 끊임없이 정쟁 수단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국민의힘은 민주당에 금투세 폐지를 촉구해 왔다.
민주당이 11월을 ‘김건희 특검의 달’로 지정해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만큼, 역공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한 민주당 의원은 “그동안 여당은 금투세 폐지를 촉구해오지 않았나. 현재 증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금투세를 밀어 붙이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며 “정무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금투세 폐지’ 꺼낸 李 중도확장 ‘합리적인 우클릭’ 전략
이 대표는 지난 9월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을 “보수에 가까운 실용주의자”라고 칭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대표의 이번 결정은 중도 외연 확장을 위한 합리적인 ‘우클릭’ 전략이었다는 평가다.
이 대표는 최근 세제 정책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외교·종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각계 인사를 만나며 외연 확장 행보에 나서고 있다. 그는 주한캐나다 대사, 주한호주 대사를 만나 양국 우호를 다지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보폭을 넓히고 있다. 오는 11일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찾아 정책간담회도 실시하고 이번 주 중 불교계 유명 인사인 법륜 스님과 만남도 예정되어 있다.
그는 전날에 최태원 SK회장과 만나 AI 관련 기업 간담회에 참석했다. 지난달엔 보수 진영 책사로 꼽히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과 만난 것에 이어 지난 9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상돈 전 의원을 만났다. 보수 인사와 만남을 가지며 보수·중도층을 끌어안고, 친시장·친기업 면모를 부각해 대권 행보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다만 이 대표의 외연 확장 행보가 같은 진보 진영 내 이념 및 노선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조국혁신당, 정의당 등 야권은 이 대표의 금투세 폐지 동의 결정을 두고 “깊은 고민은 없이 눈앞의 표만 바라본 결정”이라며 “김대중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서생적 문제 인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은, 상황이 어려우면 원칙을 파기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