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시가 추진 중인 2361억 원 규모의 부산공동어시장 현대화 사업이 착공 전부터 거센 불신과 충돌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15일 설계안 검토를 위해 현장을 찾은 시청 관계자들이 어시장 측 제지로 발길을 돌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현장을 위한 사업에서 현장이 빠졌다’는 비판이 불거지고 있다.
국비와 시비가 투입되는 공공 프로젝트에서 실질적 사용자, 즉 어민과 시장 운영 주체가 배제된 채 설계가 진행됐다는 구조적 결함이 이번 갈등의 본질이다.
“50년 생계 공간인데, 설계에는 없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에 위치한 부산공동어시장은 대한민국 수산물 유통의 핵심이다.
연간 위판액 1조 원, 하루 위판량 600톤. 수천 명 어민의 생계와 수산물의 흐름이 이곳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시설은 반세기 전 그대로다. 노후한 냉동창고, 낙후된 위판장, 비위생적 물류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개선 요구를 받아왔으나 늘 ‘차후 과제’로 미뤄졌다.
이에 부산시는 2015년 어시장과 협약을 맺고 현대화 사업을 본격화했다. 총 2361억 원의 사업비 중 국비가 70%, 시비 20%, 어시장 자부담 10%를 부담하는 구조다.
입찰에는 3개 건설사가 참여했고, 현재 설계안에 대한 기술심사가 진행 중이다. 시공사 선정은 7월 초로 예정돼 있다.
갈등의 뿌리는 ‘어민이 빠진 설계’에서 비롯됐다.
정연송 공동어시장 대표는 “냉동공장과 가공시설, 사무공간이 축소되거나 빠졌으며, 이는 어민 생업과 직결된 문제”라며 “형식적 협의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반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현장 실사를 위해 어시장을 방문한 시청 관계자 10여 명은 어시장 측의 제지로 1시간 이상 대치하다가 결국 철수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이는 공공사업 과정에서 현장이 ‘객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해석된다.
시 “설계안 변경은 불가”… 어시장 “절박함 외면, 귀 막은 행정”
부산시는 “국비 투입 사업 특성상 예산 항목 간 전용이 불가능하다”며 설계 변경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시 관계자는 “설계안 변경 시 총사업비 재조정이 필요하고, 이는 국비 삭감 또는 사업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어시장 측은 “예산 증액이 아니라 리모델링 등 구조조정을 통한 현실적 조정을 요청한 것”이라며 “시가 행정 논리만 앞세우고 현장의 절박함에 귀를 닫고 있다”고 반발했다.
기술심사단도 “닫힌 회의”… 형평성 뒤의 배제
어시장 측은 기술심사단 구성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시장 측이 실무를 이해하는 인사의 참여를 요청했지만, 시는 “형평성 문제”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부산시 관계자는 “기술심사단은 1년 전 공개모집한 외부 전문가 풀(pool)에서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선정된 구성”이라며 “공정성을 위해 외부 인사의 참여가 원칙”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어민들은 “그런 제도가 있다면 왜 실수요자인 우리에게 고지조차 하지 않았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행정-현장 갈등이 아닌, 공공행정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라고 진단한다.
부산대학교 도시공학과 A 교수는 “실수요자의 의견이 형식적으로만 수렴되고 실질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면, 이는 절차주의 행정의 실패”라고 말했다.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는 “공공 인프라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가 본질”이라며 “실수요자가 빠진 기획은 반드시 왜곡되거나 실패한다”고 강조했다.
“수산업의 미래를 짓는일 … 더는 밀어붙이지 말라”
부산시는 당초 계획대로 시공사 선정과 착공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어시장 측은 ‘현실 조정 없인 협조 불가’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사업은 단순한 신축이 아니다. 지역 수산업의 미래, 어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구조 개편의 시작점이다.
“수산업의 미래”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번 갈등은 단순 충돌이 아니라 공공성의 본질을 되묻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