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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문화] 우에노 여사는 장롱 위에서 앨범을 꺼냈다. 24세에 시모노세키에서 결혼해 부산을 거쳐 서울 흑석동에 정착하기까지의 옛 시절이 흑백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흑석동에서 살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집이 있었지요. 선생은 남들과 어울려 식당에도 가지 않았어요. 언제나 내가 끓인 김치찌개와 밥이 제일 맛있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웠지요. 술과 담배도 안 하고 우아키(바람기)도 없는 강직하고 청결한 사람이었어요.”
우에노 여사는 흑석동 시절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연못시장’을 기억해 냈다. 그곳에서 장을 봐 음식을 장만했다지만 또한 연못시장은 선술집이 즐비한 곳이 아니던가. 글줄이나 쓰는 문인치고 연못시장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진대 손창섭은 그 흔한 선술집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것이다.
옛 사진에는 손창섭과 우에노 여사 사이에 강아지가 많이 등장한다. “생명이 붙은 건 다 좋아했는데 특히 강아지를 좋아해 셋집에 살 때도 늘 개를 키웠지요. 그런 사람이 요실금으로 기저귀를 차고 있으니 참….”
한순간, 그는 앨범 속 한 장의 흑백사진을 가리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행복했던 한 시절은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일까. ‘1955년 12월25일’이라고 써넣은 사진 속 손창섭 부부는 외투를 껴입고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정말 극적으로 찍은 것인데 이거 보세요. 내가 냄비를 품에 안고 있지요. 이 냄비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 줄 아세요. 크리스마스날 출판사에서 보너스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내가 냄비를 들고 따라 갔지요. 어떤 출판사인지, 어떤 거리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는 소매치기가 너무 많아서 한번은 선생이 인세를 받아오다가 소매치기에게 안창을 따여 돈을 몽땅 잃어버린 일이 있어요. 아마 그런 일이 있은 직후 같은데 내가 냄비를 들고 따라 나섰지요. 마침 크리스마스여서 길거리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더군요. 주소를 적어줬더니 나중에 우편으로 사진을 보냈더군요.”
우에노 여사는 흑석동에 살 때 미용사 자격증까지 딸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아미모노(편물)을 배워서 내가 양말이고 스웨터고 다 짜서 선생에게 입혀 드렸지요. 이 사진 좀 보세요. 선생이 내가 짠 양말을 신고 있잖아요. 여기 또 한장의 사진이 있군요. 59년 제4회 동인문학상 시상식 때 내가 따라가 함께 찍었지요.”
연방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찍어내면서도 우에노 여사는 아주 슬프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그것은 올곧은 작가의 아내로 살아온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도쿄=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