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의 저주’ 한일전의 새로운 승부방정식

‘입의 저주’ 한일전의 새로운 승부방정식

기사승인 2009-03-12 11:28:05
[쿠키 사회]“입방정떨면 반드시 진다?”

한국과 일본의 야구 국가대항전에서 새로운 승부방정식이 나타났다. 바로 상대방에 대한 도발적 발언을 한 팀이 반드시 진다는 것이다. 실력 이외의 변수가 승부에서 작용하곤 하는 한·일전은 ‘언어도발=패배’라는 등식이 사실상 확고부동하게 자리잡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도발발언의 수혜자였다. 프로야구 연륜이 앞선 일본이 우리나라를 한 수 아래로 보고 선수건 감독이건 오만한 발언을 수시로 내뱉으면서 도리어 대표팀 단결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도발하면 국민 및 대표선수들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일본의 천재타자 스즈키 이치로가 내뱉은 유명한 ‘30년’발언이다. 이치로는 2006년 제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 예선전을 앞두고 “(한국 등) 다른나라들이 30년동안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야구팬들은 이에 대해 “상대팀을 무시하는 대단히 오만한 발언”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치로는 파문이 일자 “내부 단합을 위한 수사일 뿐”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그의 망언은 자국팀이 아닌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한 결과를 낳았다. 이는 당시 WBC에서 두차례나 일본을 꺾는 기폭제 역할로 작용했다. 이후 이치로는 ‘입치료’라는 오명으로 더 유명해질 정도로 한국민들 사이에 회자되는 인물이 됐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우리나라는 도발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일본대표팀의 호시노 감독은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간판타자인 이승엽에 대해 “이승엽이 누구냐”라고 말해 대표팀의 자존심을 긁었다. 또 틈만나면 전년에 있었던 베이징올림픽 예선당시의 위장타순논란을 끄집어내면서 국민정서를 자극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팀은 “어디 두고보자”며 칼을 갈았고 호시노 효과(?)로 일본을 두차례 연속 꺾으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일본에 대한 잇단 승리에 우리 선수들의 정신도 잠시 느슨해졌다. 이달 열린 WBC에서는 그동안의 잇단 완승에 고무된 듯 우리 선수들의 선제 발언이 눈에 띄었다. 타깃은 어느덧 우리야구팀의 눈엣가시로 자리잡은 이치로였다. 일본 킬러로 불린 김광현은 이치로에 대한 질문에 “이치로가 누구예요?”라고 되물었다. 일본 언론은 그의 말을 대서 특필했다. 또 이치로가 승부치기에서 투수로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에 이대호는 “이치로가 등판한다고? 그럼 나도 매경기 마무리투수로 나서겠다”고 받아쳤다. 국민들은 젊은 대표선수들의 도발적 발언에 속시원해했지만 경기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일본에 14-2 콜드패라는 사상 최악의 경기결과는 김광현의 투구난조와 이대호의 수비 미흡이 결정적이었다. ‘입의 저주’를 우리대표팀이 절감한 순간이다.

다행히 참패를 반면교사 삼은 탓에 우리나라는 순위결정전에서 일본을 제압했지만 ‘자나깨나 입조심’의 격언을 가슴깊이 아로새긴 계기가 됐다.

덕분에 양국 대표팀은 이제는 겸손모드로 들어갔다. 이치로도 말조심하고 있으며 하라감독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도발을 기대한 야구팬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어느덧 한일전에서는 선수들의 부상 뿐만 아니라 말조심도 경기에서 필수적으로 챙기는 요인이 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고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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