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일 서울 월계동 광운대 정문 앞. 경기도 안양경찰서 형사과 소속 이환규(43) 경위는 주위를 조용히 살펴보며 발걸음을 떼었다. 이 경위는 ‘광운대에서 성북역까지 걸어간 뒤 지하철로 청량리까지 이동, 지하 보도를 나와 경동시장에서 물건을 사라’는 지령을 되뇌였다.
외출 나온 사람마냥 차분하게 걸으며 이 경위는 자신을 뒤쫓아 올 사람들을 머리 속에 그리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추격자들 흔적을 찾기도 했다. 2시간여동안 이 경위를 따라다닌 추격자 4명은 이 경위 동선이나 행동 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진으로 찍고 보고서에 빼곡하게 기록했다. 보고서에는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뉘어 정리됐다. 외뢰인의 요구사항, 추적내용, 사진, 추적에 따른 결과 분석이 담겼다.
이 경위와 추격자 4명은 모두 한국민간특수행정학회가 주관하는 민간조사관(탐정) 교육과정에 참여한 교육생들이다. 이들은 8주 동안 감시·추적·미행실습 외에 인간행동심리, 보험범죄·교통사고 조사, 탐정 사격 훈련, 도·감청 탐색, 필적·문서 위조 감정 등을 배웠다.
2006년 안양 지역에서 여성 3명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잡는 등 강력사건만 15년째 맡아온 이 경위는 “추적 보고서의 경우 의뢰인이 보고서만 보고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라며 “경찰 내부에서도 잘 배울 수 없는 것을 교육받았다”고 말했다. 미아 전문 탐정을 꿈꾸는 이 경위는 지난 2월22일 8주 교육을 마치고 민간조사관 사설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국판 ‘셜록 홈즈‘를 꿈꾸며 탐정 민간 자격증 취득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종 미아 찾기, 증거 조사 등에서 민간조사관 수요가 높아져 탐정이 곧 제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탐정 민간 자격증을 발급하는 한국민간특수행정학회는 2002년부터 최근까지 수료생 950여명을 배출했다. 한국탐정협회, 한국 민간조사협회 등도 유사한 자격증을 발급하고 있어 탐정 민간 자격증 취득자 수는 1500여명에 이른다. 민간 자격증을 손에 쥔 사람들 중에는 현직 경찰, 국정원 퇴직자, 법무사, 보험회사 조사원 등 고급 인력이 부쩍 늘고 있다.
A보험사 사고조사팀장 박철현(44)씨도 민간조사관 자격증을 땄다. 박씨는 “교육과정 동안 문서 감정, 지문감식, 교통사고 등 여러 분야의 폭넓은 조사업무를 배웠다”며 “보험 범죄로 유출되는 돈이 매년 2조6000억원에 이르는데 민간조사관 제도가 도입되면 보험 범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정보원에서 20년간 일하다 퇴직한 부창민(63)씨 역시 탐정을 꿈꾸고 있다. 탐정 소설을 즐겨 읽었던 부씨는 행정사 사무소를 운영하며 탐정 제도가 입법화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부씨는 “보험 사기 범죄에 관심이 많아서 환자를 가장한 사람을 병원에서 주거지까지 미행 감시하는 등 증거 확보에 나선 적이 있다. 하지만 월권, 사생활 침해 등 현행법에 막혀 구체적 증거를 확보하고도 범죄 입증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는 탐정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면 불법이다.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탐정이라는 용어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채권추심업무를 허가받은 신용정보업자 외에는 특정인 소재를 탐지하거나 사생활을 조사하는 일도 못하게 하고 있다.
탐정 제도가 법제화되지 않으면서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 탐정 역할을 하는 심부름센터나 흥신소는 현재 3000여개가 넘는다. 심부름센터는 자영업으로 분류돼 정부 관리 감독을 받지 않는 탓에 사생활 침해, 개인정보 유출, 불법 도청 등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탐정 입법화가 지체되면서 한국에 진출한 해외 민간 조사업체들이 최대 2조원대에 이르는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힐앤어소시에이츠(H&A), 크롤, 핀커튼 등 20여개 해외 민간조사업체는 ‘위기관리 센터’ ‘컨설팅’ 등의 간판을 달고 민간조사 영업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미 수요가 있는 탐정을 제도화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계명대학교 경찰학부 이성용 교수는 “공권력이 감당할 수 없는 실종자 찾기, 기업의 재산권 침해 문제 등 증거·사실 조사 수요를 민간조사제도 도입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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