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국의 광장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무장한 10∼20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장년층, 유모차를 끌고나온 주부 등 수많은 사람들로 뜨거웠다. 하지만 촛불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뿌리 깊은 불신, 이념 갈등을 고스란히 노출한 장이기도 했다. 폭력시위, 강경진압이라는 악순환도 되풀이됐다.
촛불집회는 ‘선동의 해방구’와 ‘거리로 나온 민주주의’라는 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촛불을 정의하는 수많은 수식어만큼 의미도 제각각이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 촛불에 반대했던 사람에게 지난 1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촛불의 한복판에 있었던 9명에게 촛불의 의미와 지난 1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촛불, 거리로 나온 민주주의=촛불 정국 당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촛불은 국회의사당에 갇힌 민주주의를 거리로 불러낸 원동력”이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들의 열기가 정치·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가장 큰 변화는 촛불로 인해 시민들이 국민주권의 힘을 경험했다는 점”이라며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도 국민과의 소통을 무시해선 안된다는 교훈을 대한민국에 던졌다”고 분석했다. 광우병을 다룬 TV토론회에서 한승수 총리를 몰아붙이며 인터넷 스타가 된 ‘고대녀’ 김지윤(25·고려대 사회학과)씨는 “촛불 이후 젊은층 사이에서 정부가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퍼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토록 뜨거웠던 열기도 어느 순간 가라앉았다. 용산참사, 언론인 구속 등의 사건으로 민주주의 위기론이 다시 대두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제2의 촛불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난해 촛불집회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됐던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제2의 촛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며 “그 때의 촛불은 유희적, 오락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말했다. 용산참사 등 생존권과 직결된 심각한 사안도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 팀장 역시 “정부의 집회 탄압에 경제위기까지 닥친 상황이라 촛불이 재점화되긴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 세대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격 앞에서 일단 촛불세력들은 위축돼 있었다. 촛불집회 당시 의료봉사단장을 맡았던 김하나(47)씨는 “자유가 억압받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는 상실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왜곡으로 촉발된 선동의 해방구=김민호 성균관대 법대 교수는 “평화적인 촛불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교육장이었지만, 폭력으로 변질된 이후에는 거짓말과 선동의 해방구였다”고 말했다. 구상진 서울시립대 법학대학원장 역시 “당시 우리 인터넷 문화는 무절제했던 측면이 있었다”며 “책임이 동반되지 않고 무질서하면 자유의 긍정적인 면도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촛불집회의 당사자가 됐던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촛불을 “사회의 불신으로부터 생긴 필연적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촛불시위를 촉발시킨 광우병 괴담은 허위였다”고 짚었다. 우리 사회가 불신과 부정의 기반 위에 서 있었기에 허위가 군중을 순식간에 휩쓰는 게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는 그러면서도 “촛불을 통해 우리 사회가 사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웠다”며 “법과 원칙이 무너지면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게 들고 국가 품격도 떨어진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 전 장관은 “1년이나 지났다며 감회가 큰 사람도 있겠지만 다 지나간 일”이라며 “법과 원칙이 평가할 것”이라고 자신의 평가는 유보했다.
촛불 시위대 해산을 지휘했던 어청수 당시 경찰청장은 “촛불 이후 외출할 때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도 착용한다”며 “자유인으로 돌아온 지금도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식당에서도 모두 알아봐 자식들도 나와 밥먹기를 싫어한다”고 쓸쓸히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 3개월 밖에 안 됐는데 3년이 흐른 듯 하다는 그는 “지금 시점에서 촛불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더 이상의 인터뷰를 사양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양진영 권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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