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에 프리뷰는 없다…박 감독과 7인의 배우

‘박쥐’에 프리뷰는 없다…박 감독과 7인의 배우

기사승인 2009-05-01 13:43:00

[쿠키 영화] ‘박쥐’는 프리뷰가 없어야 할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정보 없이, 처음으로, 생경하게 만났을 때 몰입이나 만족의 수치가 배가 될 작품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임팩트를 지닌 ‘그 장면’에 대해 이미 글과 말로는 공개된 점이 그래서 더욱 아쉽다. 길을 가다가,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벽이 떨어져 내 앞길을 막아 세운 듯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면에 대한 구체성은 배제하고 가능하면 주관적 감상을 적는 이유는 ‘그걸 알았으니 이미 다 봤네’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단 한명의 관객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서다. ‘박쥐’안에는 즐겨봄직한 영화적 요소들이 즐비하다.

1. 박찬욱

개인적으로, 작품성과 상업적 대중성을 겸비한 것이 박찬욱 감독 영화의 특장이라고 여겨왔다. ‘박쥐’는 영화적 요소들의 완성도 있는 결합에 힘을 실어 오롯이 작품성이 부각된다. 그렇다고 대중적 재미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상업적 흥행을 고려한 노림수가 포진돼 있지 않다는 것일 뿐, 가장 영화적일 때 가장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박쥐’를 보노라면, 박 감독이 오랫동안 해오고 싶었던 얘기, 가슴속에 조심스레 품어온 이야기보따리 풀어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조심스러웠던 크기만큼 완성도에 공을 들였구나 하는 생각도 자리 잡는다. 전작들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 덩어리인 듯싶으면서, 작품의 완성도와 주제적 완결성은 ‘완결편’으로 다가오는…처음과 끝이 만나있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오묘한 느낌은 영화에 대한 호감도를 키운다.

진지하게 작품에 임하면서도 버릴 수 없었던 박 감독 특유의 언어유희는 우리를 웃게 한다. ‘왜 이렇게 젖었어?’ ‘수요일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나’의 대사가 귀를 타고 들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이미 회자된 ‘그것’은 거장이어서 이런 장면이 가능했을까, 이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거장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일까 하는…, 어찌 보면 어리석고 단순한 생각을 불러올 만큼 보는 이를 ‘멍하게’ 한다. 그러나 머릿속이 빈 듯한 멎음은 찰나일 뿐, 나의 눈은 이미 그 장면에 익숙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흔치 않은 시연이 마치 그동안 봐왔던 친근한 장면인 것처럼 착각할 만큼 미장센은 자연스럽게 연출됐다. 촌음에 생경하고 촌음에 거부감은 누그러진다.

2. 송강호

그것이 다른 배우에 의해 시연되었어도 부드럽게 다가왔을까. 행해진 바 없으니 비교가 무의미하지만, 한국영화 사상 중요한 순간에 송강호라는 배우가 들어있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어린 양들을 살리려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 현상현, 친구의 아내를 구해내려다 불륜남이 되는 신부 현상현은 사면초가의 함정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다. 한 점의 동정도 구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까지 주인공을 몰아넣고 박 감독은 사제의 종교적 구원, 인간의 구원에 대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짐 지듯 현상현이 있고, 관객의 몰입과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송강호가 있다. 현상현은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같은 이름처럼, 결국 저다운 선택을 우리에게 남긴다.

어떠한 처절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송강호 특유의 유머를 영화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라면 엎는 장면에서 본 뒤 그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희망했다. 관객의 끝없는 욕구는 배우에게는 형벌일 테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이상한 놈’ 송강호는 나무랄 데 없는 대단한 연기를 보여줬지만, 신선할 것 없는 평작으로 다가왔다. 그런 몹쓸 아쉬움을 송강호는 ‘박쥐’를 통해 해갈시켜 준다. 태주(김옥빈 분)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상현을 연기해서도 아니고 전라를 드러내서도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영화 ‘밀양’에서 살짝 보여주었던 모습의 심화판이다. 상대의 속내나 계산과 상관없이 자신의 순수와 순정을 다하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돌려받을 것 없고, 돌려받기를 꿈꿀 수조차 없지만 ‘마음주기’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남자의 모습. 보는 이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고 눈물겹게 하는 사랑을 송강호가 보여준다. ‘밀양’에서 신애(전도연 분) 한 발짝 뒤에 서있었다면 이번에는 태주 앞으로 나서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사랑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던가, 치명적 멜로의 늪에 빠져 남자다움을 뿜어내는 송강호를 보는 재미는 신선하다.

3. 김해숙

바가지 단발머리와 그믐달 초승달 같은 얇은 눈썹선과 천박하도록 붉은 입술화장에 웃음이 터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김해숙의 열연 때문이다. 매섭도록 진지한 열정은 관객에게 가벼운 비웃음을 허락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이 배우로서의 김해숙을 재탄생시켰다”고 자평할 만큼 괄목할 만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줄리앙 슈벨 감독의 영화 ‘잠수종과 나비’에서 왼쪽 눈의 깜빡임으로만 연기했던 매티유 아맬릭에 버금가는 호연이다.

영화 ‘해바라기’ ‘경축! 우리사랑’ ‘무방비도시’,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 등에서 다양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김혜자를 이을 ‘국민엄마’로 떠오르는 그이지만, 현재 드라마 ‘하얀 거짓말’에서 모자란 아들을 과잉보호하는 모성애를 연기하고 있음에도 ‘라 여사’ 연기는 판이하게 다가온다. ‘하얀 거짓말’과 ‘박쥐’의 비슷한 모자 관계를 걱정한 것은 순전히 기우일 뿐이었다.

“배우라는 것은 정말 끝이 없구나”라는 깨달음 속에 매 작품마다 배워간다는 김해숙의 자세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를 탄생시킨다. 김해숙이 훌륭한 배우인 것은 흠잡을 데 없는 연기에서도 확인되지만 겸손함에서 오는 쉼 없는 자기단련을 행하는 것에서 명백해진다.


4. 신하균

김해숙과 함께 소름 돋는 영화적 연기로 ‘박쥐’의 보는 재미를 더하는 배우는 신하균이다. 언짢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영화 ‘더 게임’보다 더욱 빛나며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마치 마임을 하는 듯한 표정과 자세는 영화가 끝난 뒤 오래도록 눈앞을 어른거린다. 맥락을 다시 더듬어보면 마치 자다가 봉변당하듯 최대 피해자일 수 있는 한심한 강우를 생생하게 연기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의 인연으로 박 감독, 송 배우와 함께 하게 되면서 일곱 살 많은 송강호와 친구로 나오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우의 독특함이 나이를 잊게 한다.

송강호가 뱀파이어가 된 신부라는 비현실적 존재를 통해 사랑과 종교적 구원에 관한 현실적 주제를 풀어낸다면, 신하균과 김해숙은 모자란 아들에 모성 넘치는 어머니라는 다분히 현실적 존재를 통해 흔히 볼 수 없는 비일상적 감정을 표현해낸다. 세 배우는 태주를 줄 삼아 줄다리기를 하는 양편의 선수들처럼, 집 안과 밖의 사람처럼 대별되는 차이로 영화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5. 김옥빈과…

스물넷의 나이에 이 정도 폭발력 있는 연기력을 펼쳐낸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태주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중성적 매력의 보이스, 앳된 얼굴에 성숙한 몸매를 지닌 고유의 신체 조건이 캐릭터에 썩 잘 어울린다.

그러나 매 장면장면 연기 잘한다는 느낌은 들지만, 태주의 역사성을 체화해 냈다는 깊이감은 없다. 다른 누가 했으면 좋았겠다는 게 아니라 배우 김옥빈이 조금 더 입체감 있는 연기를 해주었다면 금상첨화였겠다는 아쉬움이다. 열심히, 독을 품고 연기하는 듯한 모습은 관객의 캐릭터 몰입에 걸림돌이 된다.

반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되 영화에 안정적 기반을 제공하는 두 배우가 있으니 송영창과 오달수다.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 외양과 현실적 감정을 가진 인물들인데, 두 사람이 있어 이 영화가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본분에 걸맞게 상현에게 제 팔을 내밀며 살아있는 목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오감 만족을 욕망하는 모습을 연기한 박인환도 이름값 하는 조력 연기를 선사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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