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서울 도곡동 사립 C고등학교엔 입시진학부장 최모(44) 교사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치러지지 않은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가 2005년 3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22차례 학교 밖으로 새 나간 사실이다. 과목별로 한 장씩 메가스터디나 이투스 같은 유명 입시업체로 흘러 들어갔다. 아무도 몰랐다. 최 교사는 시험 전날마다 가장 늦은 시각까지 학교에 남아 문제지가 담긴 상자와 봉투를 뜯었다. 입시업체 관계자는 이 작업이 끝날 때쯤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EBS에선 학력평가 문제 풀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윤모(42) PD가 '구멍'이었다. 그는 서울시교육청에서 문제가 담긴 파일을 받으면 이메일에 첨부해 조카에게 보냈다. 조카는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김모(35) 원장이었다. 김 원장은 지난 3월 평가 전날 언어영역 지문 4개를 그대로 옮긴 문제를 수강생에게 선보였다.
서울지방경찰청은 1일 최 교사와 김 원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각각 공무상 비밀표시 무효,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다. 윤 PD는 김 원장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대형 온라인 입시업체 관계자 6명도 불구속 입건됐다. 문제지를 넘겨받아 해설 동영상을 제작한 혐의(공무상 비밀표시 무효) 등이다.
경기 평택과 분당에 있는 사립고 교사 4명은 문제지를 유출했지만 형사 처벌을 면했다. 함께 적발된 인쇄소·출판사 4곳도 마찬가지다. 경기 지역 교사들은 2005년부터 최근까지 친하게 지내는 입시업체 관계자에게 많게는 10차례 문제지를 건넸다. 그러나 이들은 최씨와 달리 열린 상자에서 문제지를 꺼냈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이들 교사와 입시업체가 대가성 금품을 주고받은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교육 당국의 허술한 시험 관리 체계 탓에 빚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지 인쇄 용역을 맡은 업체들은 계열사나 친동생이 운영하는 학원 등에 상습적으로 문제지를 빼돌렸다. 한 업체는 2004년 10월부터 1년여간 문제지를 추가 인쇄해 빼돌리면서 한 부에 4000∼8000원씩 1만여부를 학원 10곳에 팔았다.
사립학교 교사는 문제를 유출하더라도 처벌할 법 규정이 없다. 국가공무원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국·공립 교원과 달리 사립 교원에 대한 징계는 소속 학교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전국 단위 문제지가 이런 상태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교육과학기술부 등과 협의해 관련 법 조항을 개정토록 건의하겠다"고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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