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약속 지켰다…그의 인터뷰는 AS도 된다
하정우도 고개 돌리는 <추격자> 지영민 연기 두 가지
[쿠키 연예] “조만간 한 번 보자” “다음에 술 한 잔 살게”.
길에서 스치듯 만났거나 자리를 파하고 헤어질 때 흔히 이런 말을 뱉는다. 말을 하는 쪽도 받아들이는 쪽도 이 막연한 약속에 대해 반드시 지키려고 하거나 지키지 않았다고 따져 묻지 않는다. 이별의 아쉬움, 상대와 오늘의 자리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말로 건네고 그렇게 이해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 공현희(엄지원 분)는 그렇게 쉽게 했던 말들의 무책임함에 대해 호되게 꾸짖는다. 영화를 보며 속이 뜨끔 저렸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건네는 내 언사를 단속하겠다는 마음이지 상대에게 약속이행을 요구하겠다는 의지는 조금치도 없었다.
하정우의 인터뷰는 ‘애프터서비스’도 된다
그랬기에, 준비해온 질문지의 두 번째 쪽을 묻지 못했다는 기자에게 “500만 넘으면 인터뷰 다시 할게요. 그 때 못한 것 마저 하세요”라고 말하는 배우 하정우의 사람 좋은 웃음을 어떤 ‘약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상냥하고 깍듯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국가대표>가 관객 400만 명의 선택을 받았다는 보도가 인터넷을 크게 장식한 때였다. “관객분들의 큰 사랑이 계속 된다면 오는 주말 500만을 넘을 것 같습니다 ^^. 마케팅팀 통해서 다음 주에 날짜 잡겠습니다”라는 문자에 적잖이 놀랐다. “언제 한 번 봐야지” 정도의 말을 기억하고 연락을 준 친구의 문자인양 반가웠다. ‘인터뷰 애프터서비스’를 약속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는 문자 앞에, 설사 이런 저런 일들이 얽혀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고 해도 ‘배우 하정우의 마음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국가대표> 보신 분들게 큰절 하고픈 심정
AS 인터뷰는 지난 주 진행됐다. 하정우가 약속을 지키고 초저녁까지 수애와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찍은 뒤 관객 무대인사로 밤을 보내는 한 주 동안, ‘500만 돌파를 기념한 AS’를 수행한 <국가대표>는 600만 명을 돌파하는 흥행성적을 거뒀다.
그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영화 들어갔다고 하면 군소리 듣지 않고도 홍보전선에서 빠질 수 있을 텐데 왜 이리 열심이냐고 물었다. 곁에 있던 <국가대표>의 제작사 KM컬쳐의 기획이사도 “‘티파니…’와 촬영시간대가 겹쳤던 개봉 첫 주를 빼고는 무대인사에 꼬박 참석하고 있다”며 “다른 배우들 모두 열심이지만 정우 씨의 참석률이 가장 높다”며 칭찬을 보탰다.
“아유, 시간만 된다면 목발을 짚고라도 해야죠. 츠마부키 사토시랑 함께 한 <보트>의 일본 홍보 때 한 200개 매체랑 인터뷰를 한 것 같아요. 작은 영화도 그만큼 하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는 작품이면 뭐든 열심히 해야죠. 정말 마음 같아선, 영화 봐주신 분들 한 분 한 분을 찾아가 큰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감사하고 있는 걸요.”
차헌태는 <국가대표>라는 그림의 ‘여백’
살아온 얘기며 좋아하는 영화들, 코흘리개 때부터 함께 해온 친구들 이야기와 남자들의 수다에 대해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하정우를 보노라니 스타의식 대신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속 인간미가 다가왔다. 굴곡진 삶을 살아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가슴 깊이 받아들여선지,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남은 상처와 얻은 교훈을 말하는 모습이 따뜻했다. 고전부터 최근작까지 영화를 탐닉하고, 기쁨이든 힘겨움이든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삶이 배우 하정우의 연기 밑천이자 교과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격자>에서 엄중호가 ‘야, 4885?’ 할 때 지영민이 돌아보잖아요. 그 돌아보는 표정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케이프 피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주는 묘한 공포감, <프랑켄슈타인>에서 마찬가지로 드 니로가 뿜어내는 복수심, <마이 라이프>에서 마이클 키튼이 보여준 절박감…뭐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드러내고 싶었어요. 욕심쟁이죠?(웃음). 제 욕심만큼 관객분들이 그런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끼셨다면 너무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아, <추격자>에 비해 <국가대표> 연기는 너무 밋밋한 거 아니냐고요? 맞아요, 어찌 보면 표정도 평범하고 개성적인 말투도 없죠. 김용화 감독이 음악을 많이 쓰시고 편집도 쪼개는 스타일이세요. 영화 시작할 때 ‘나는 여백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촬영할 때도 그러려고 애썼고요. 철저히 기능적으로 역할했다고 할까요. 순수한 정신과 몸을 상황에 부딪쳐 실험해봤던 학교처럼, 그렇게 깨끗하게 연기하려고 했어요.”
영화 얘기가 나오니 역시 열정으로 눈빛이 반짝거리고 입은 열심히 생각을 전한다. 배우로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보다 영화 전체의 원활한 순환을 위한 기능적 역할, 관객이 한숨 돌릴 여백을 택한 하정우. <국가대표>의 진정한 주인공답다.
“방 코치(성동일 분)에 흥철이(김동욱 분), 칠구(김지석 분) 가족에 재복이(최재환 분)네,
헌태(하정우 분) 주변까지 정말 인물이 많아요. 선수 다섯에 코치님까지 여섯이 모두 주인공이죠. 이 와중에 관객에게 남길 배우 하정우의 인상적 잔상을 고집하면 안 되죠. 또 초반에 여러 선수와 그의 가족들을 오가느라 영화가 좀 지루해졌다고 지적하시는 분들 있는 것도 알아요. 이야기를 Bob(밥·헌태의 미국 이름)에게 몰아버리면 내러티브의 긴장감은 높아질 거요, 대신 후반부에 나올 스키점프 장면의 임팩트가 떨어졌을 거고요. 초반 지루함은 감독님의 의도였습니다. 저도 카메라의 관심이 인물들에게 골고루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추격자>, 하정우도 눈 뜨고 못 보는 두 가지 장면
하정우를 얘기하다 보면 <추격자>가 따라다닌다. 그의 말대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까지는 “하나만 시켜주십시오”하던 때였고, <용서받지 못한 자>는 “작품이 그렇게 커질 줄 모르고 그냥 덤볐던 영화”였고, <구미호 가족>은 아직은 배우로서 자신감이 부족해 짙은 분장과 강한 개성 속에 “나를 가리고 싶어” 택했던 영화였다. 여전히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낸 작품은 아니었지만, 소년의 순수함을 풍겨 더욱 소름 돋게 무서운 연쇄살인마 지영민을 통해 하정우는 연기파배우 반열에 우뚝 섰다.
특히나 개미수퍼의 안방에서 드러낸 잔악함은 그야말로 본 적 없는 미증유의 연기여서 “오 형사(박효주 분)가 그렇게 어설프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미진(서영희 분)의 생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수많은 누리꾼의 원망을 자아내며 오 형사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혹자는 영화 <추격자> 보는 일을 막노동에 비유한다. 두 손에 힘을 꼭 쥐고 이를 악 물고 123분을 보내고 나면, 온몸의 진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뜻의 비유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몸을 힘들게 하는 영화, 그것을 가능케 한 배우는 연기가 얼마만큼 고됐을까.
“전혀 고되지 않았어요. 개미수퍼 장면도 그렇고 목욕탕에서 후려치는 신도 그렇고, 마침 그날 몸이 좋지 않았던 서영희 씨 자기 분량 먼저 찍게 해서 보내놓고 저 혼자 찍은 거였거든요. 그런데 나홍진 감독께서 편집해놓으신 것 보니까 정말 끔찍하더라고요. 어찌나 무서운지 그 두 장면만큼은 연기한 저도 눈을 감아버릴 정도예요.”
촬영장 분위기가 스크린 위와는 사뭇 달랐다는 얘기는 엄중호 역의 김윤석도 했던 말이다. 두 마리의 미친개가 들러붙어 싸우는 듯한 영화 막바지 하정우와의 격투신에 대해서도, 관객은 몸서리치지만 연기자들끼리는 리얼해 보이되 서로의 몸을 다치지 않게 배려했노라고 설명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기에 대해서는 정우도 선수고 나도 선순데 그걸 진짜 막싸움으로 하나요. 되레 진짜로 싸우면 그런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지도 않고요”라고 지난해 2월 개봉을 앞둔 인터뷰에서 밝혔다.
방학은 끝났다? ‘당신’이 움직이시면 됩니다
비인기 종목인 스키점프 선수들의 애환을 웃음과 감동으로 빚어낸 <국가대표>는 개봉 5주를 넘어서며 600만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개봉 3주차부터 가속도를 붙여 달리고 있으니 뒷심을 기대해 볼만도 하지만, 초·중·고·대학생들의 방학이 끝나면서 관객 규모 자체가 줄어들어 흥행 탄력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매일 매일 오늘은 몇 분이 봐주셨나 확인해요. 개학했다는 사실이 이미 관객 수에서 실감나던걸요. 그동안 많은 학생 분들이 우리영화를 사랑해주셨구나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이제 흥행 내리막길을 걸을 것 같냐고 묻자 “그렇다고 이걸로 끝이구나 낙담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환히 웃는다. “지금까진 학생들부터 30대 분들까지 많이 봐주신 것 같아요. 40대 이상 중년 분들이 움직여주시면, 대한민국의 저력임을 보여주시면 계속 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젊은 분들이 부모님께 선물하고, 오랜만에 함께 모시고 나가 극장구경도 좋고요. 남편 분들이 아내에게 데이트 신청해도 좋지 않을까요?(웃음)”
넉살에 인간적이고 솔직한 바람이 묻어나니 밉지 않다. “물론 흥행을 마다할 배우가 있겠습니까마는, 요즘 어렵잖아요. <국가대표> 보시고 위로 받고 힘 받고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정우의 희망에 40대인 기자부터 발걸음을 보탰다. 가족과 함께 다시 본 <국가대표>, 두 번째니 덤덤하겠거니 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장면은 여전히 유효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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