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Z 사람]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눈시울 붉히던 ‘인간’ 앙드레 김

[Ki-Z 사람]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눈시울 붉히던 ‘인간’ 앙드레 김

기사승인 2010-08-14 15:17:00

[쿠키 문화] 최근 몇 년간 유명 인사들이 병이나 자살 또는 사고로 사망이 잇따르면서 대중들은 죽음에 대해 무덤덤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류스타 박용하가 자살했을 때도 대중들은 “왜”라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관심도는 낮았다. 박용하의 존재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대중에게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쌓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국내 1호 남자 디자이너 앙드레김 (본명 김봉남)의 사망에 대해서는 달랐다.

대중은 앙드레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길을 다시 돌아봤다. 그의 옷을 한번이라도 입은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를 추모했다. 대한민국 정부 또한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은 5일장을 치룰 것이라 예측했다. (초반 5일을 진행하려 했으나, 4일장으로 변경했다) 이는 그가 가진 존재감을 보여준 것이다. 그를 기려야 하는 시간과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이들이 앙드레김을 ‘잘’ 알지 못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머리의 ‘검은 색 마스카라’와 흰색 옷. 그리고 특유의 억양만이 남아있다. 조금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가 1999년 옷로비 사건에 연계되었고, 그 와중에 그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으로 연장시켜 그를 기억한다. 다양한 명암이 있지만, 앙드레김에 대한 타인의 평가 그리고 그의 육성을 통해 ‘인간’ 김봉남은 어땠을까.

최초의 남성디자이너 그리고 한국 미(美)의 발현

“동양에서 불어온 대선풍이 파리 지상 57미터를 맴돌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의 미는 마치 선경 (仙境)의 마술을 연상케했다” (66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패션쇼 개최후 르피가로 지(誌)의 평가)

“앙드레김의 작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이다. 끈질긴 생명력, 그 원천은 바로 그의 진실이다. 작품에 바치는 정열과 땀의 정성, 그 진실은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 증류되어 고운 장식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작품을 눈보다 가슴으로 사랑하게 된다” (일본 유명 여류작가 사또 사나에)

“앙드레김 의상에서는 지극히 동양적이면서도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세계의 미가 느껴진다” (룩셈부르크의 샬로타 왕비)

앙드레김에 대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늘어놓자면 한도끝도 없다. 그것은 앙드레김이 개척한 길에 대한 보상이고, 평가다.

1935년생으로 62년 앙드레김 의상실을 설립하고 첫 의상발표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4년 뒤 파리, 워성턴에서 국제의상 발표회를 연다. 82년에는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 훈장을 받고 92년도 바로셀로나 올림픽 개막 패션쇼를 진두지휘한다. 97년에는 대통령 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99년과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앙드레김의 날’로 선포하게 이른다.

국내 1호 남성 디자이너의 타이틀을 달고 있은 앙드레김의 역사는 바로 한국 디자이너들의 역사다. 그렇지만 절대 외국 옷감을 사용하지 않으며, 한국의 미를 기본으로 하여 국내외 패션쇼를 개최한 앙드레김의 길은 평탄치 않았다.

패션잡지 한권을 구하기 위해 외국 대사관 주위를 맴돌았고, 옷을 재단하는 이가 ‘양장점 주인’ 수준에서 머물던 시절에 이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그에게 버겁게 다가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앙드레김은 끊임없이 도전했고, 한동안 국내에서의 낮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는 국위 선양의 일선에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앙드레김을 이야기할 때 붙는 ‘올림픽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기념 패션쇼를 개최한 이후 국제올림픽연맹 (IOC)의 초청을 받아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연거푸 4차례나 초대를 받아 세계 무대에 서왔다. 전 세계에서 올림픽 행사에 이같이 연거푸 초대받기는 그가 처음이다.

또 앙드레김은 절대 자비(自費)를 들여 해외패션쇼를 개최하지 않는다. 대개 한국 디자이너가 해외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기 위해 1억원이 넘는 출혈을 감수할 때 앙드레김은 초청국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케 한다. 이런 고집은 세계 각국이 앙드레김의 ‘작품’을 도리어 찾게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앙드레김은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린다.

앙드레김은 자신이 한국적인 미를 알게 된 것을 어릴 적 기억에서 찾는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보았던 어느 전통결혼식에서 붉은색과 녹색의 활옷을 입은 신부의 옷차림이 그를 유독 자극했고, 이는 사망할 때까지도 그의 패션세계의 영감이자 원천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구현된 ‘칠겹옷’으로 일곱 개를 겹쳐입은 모델이 한꺼풀씩 벗을 때마다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곤 했다.



디자이너로서의 고집, 그리고 가족에 대한 외로움

앙드레김의 디자이너로서의 고집은 유명하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위치를 자랑코자함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옷을 입고자 하는 이를 직접 만나고, 그의 느낌을 다시 의상으로 전달코자 하는 고집이다.

지난 87년 앙드레김에게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의 어머니가 전화가 왔다. 외국에서의 대형 콘서트를 위해 의상을 주문하고 싶은데 일정상 국내에 들어갈 수 없어 사이즈만 보내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앙드레김은 이를 거절했다. 사람을 직접 보지 않고는 그에 맞는 의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디자이너로서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88올림픽을 위한 내한한 조수미는 앙드레김과 조우했고, 독특한 감성과 카리스마에 맞춰 옷은 제작됐다.

또하나의 일화는 앙드레김 사망 후 널리 알려진 미국 팝의 제왕 앙드레김과의 인연이다. 국내 첫 내한할 당시 마이클 잭슨은 앙드레김의 옷을 입었다. 그는 국내 행사 기간 내내 앙드레김의 옷을 입었고 언론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간 마이클 잭슨은 앙드레김에게 연락해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앙드레김은 이를 거절했다.

앙드레김은 당시 상황에 대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부와 명예도 아닌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런 앙드레김의 의상에 대한 영감과 성격은 그의 성장배경에 기인한다. 앙드레김을 길러준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나 앙드레김에 대한 애정은 무한이었다. 항상 깨끗하고 정갈한 것을 좋아했던 어머니 덕에 농사를 짓는 집안은 여느 집과 분위기가 달랐다. 또 술, 담배, 노름을 못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앙드레김 역시 술, 담배 대신 선택한 것이 일에 대한 몰입이다. 앙드레김이 어머니라는 단어에 가족이라는 말에 눈시울이 쉽게 붉어진 것도 이러한 과거 때문이다.

그런 앙드레김은 가족을 형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평생 후회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10여개의 신문을 보는 것을 시작으로 일에 몰두하는 앙드레김에게 외로움은 적잖은 고통이었다. 물론 먼 친척으로부터 입양한 양아들 중도는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줬다.

항상 바쁜 앙드레김에 인간적, 가족적인 외로움은 항상 존재했다. 앙드레김은 이에 “친구들을 만나도 분위기를 맞추지 못해 스스로 괴로워했고 자꾸 자리를 피하다보니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울려 노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다. 또 가족들끼리 명절이나 휴일에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면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곤 한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04년도에 며느리를 얻었으니, 아마도 생전에 그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앙드레김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자 어느 패션 관계자는 “책을 쓰시게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앙드레김이 걸어온 길을 길었고, 그가 만든 패션 역사의 폭은 넓었다. 혹자는 항상 같은 패턴의 앙드레김의 패션쇼는 발전이 없다고 말하지만, 또다른 이는 이미 한국적 미를 발현한 패션을 만들어 내어 정점을 찍은 앙드레김이 굳이 옷을 상품화하는 패션쇼를 펼칠 이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앙드레김의 패션쇼는 의상이 주가 아닌, 한국과 한국의 미가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앙드레김이 생전에 한 말에서 기인한다.

“내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정서와 인간의 따뜻한 가슴을 향한 패션휴머니스트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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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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