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영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크립트대로 촬영을 확인하고 연출, 연기, 분장 기타의 상세한 데이터를 기록하는 스크립터(scripter)는 영화 전반을 지켜봐야 한다. 장기간 촬영하는 영화의 경우 장면과 장면의 연속성이 확실하게 유지되어 통일성을 기해야 하기에 스크립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에 짧은 시간 안에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배우려 스크립터를 지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영화 전반에 개입하다보니 일은 많은 반면에 대우는 극히 낮다. 물론 영화 스태프들이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한국 영화 현실에서 스크립터만 따로 거론할 수는 없다.문제는 이렇다보니 타 영역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지는 신입 스크립터들만 활동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27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의 스크립터 최유정 씨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전 이 부분에 대해 지적했다. 일의 강도가 세다보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만하면 그만두고 초보가 들어오고, 다시 일의 강도에 회의를 느껴 그만두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곳도 스크립터의 세계라는 것이다.
“스크립터에서 연출로 올라가 입봉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문 스크립터의 부재에 대해서는 스크립을 하는 입장에서 가장 아쉽다. 이제 좀 제대로 스크립을 할 수 있을 만큼 되면 그만두고, 다시 초보가 들어오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또 일은 많은데, 대우는 좋지 않으니까. 물론 이는 스크립터 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 스태프들에게 해당된다. 저도 적은 숫자의 스크립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6~7개 영화 스크립 일을 경험한 분이 국내에 몇 분 안되는 것으로 들었다. 보통 하나나 두개 정도 하면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스크립은 영화에서 중요하고, 이는 작품을 많이 해보신 감독님들은 정말 느낄 것이다”
이 순간 도대체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보다는 어느 영역까지 스크립터의 손길이 닿아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현장 스태프들이 안 힘든 분야가 없겠지만, 감독과 함께 전체를 봐야하는 입장의 고됨은 남다를 것이라 추측했다.
사실 감독님들 성향에 따라서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달라진다. 어떤 감독님은 촬영 전 관계부터 참여하게 하지만, 어떤 감독님은 연출부나 스크립터에 대해 선을 그으시는 분들도 있어서 참여의 폭이 좁아진다. 스크립터의 영역이 사실 자기가 하려고만 하면 굉장히 넓어지는 분야다. 하지만, 힘든 일이 많다보니까 물리적인 에너지 소모가 크고, 대부분 한 명이 진행하다보니 긴 기간을 하지 않고 기술을 습득하기 전에 그만두면서 좋게 발전할 수 있는 부분들을 놓친다."
최 씨는 영화 <각설탕>을 통해 스크립터 일을 시작했다. 이후 <복면달호> <파괴된 사나이> 등 주로 현대극에서만 이 일을 수행했다. 정통 사극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극은 첫 도전인 셈이다.
“일에 대한 강도 차이는 없는데, 체크할 것이 너무 많다. 예를 들면 촬영할 때 현장에 물병이 있다든지, 보조출연자들이 안경을 쓰거나 할 때다. 또 갑자기 옷 사이로 현대물 옷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실 현대극에서는 그런 것들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여도 큰 문제는 아닌데, 그런 것들을 모두 체크하려니, 신경이 많이 쓰이게 된다. 그래서인지 사극인 이 작품을 하면서 처음에는 겁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일의 차이는 비슷했다”
스크립터로서 어려움을 토로하던 최 씨는 정작 <평양성> 촬영 현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화색이 돌았다. “충무로의 마지막 남은 유토피아”라고까지 평가한 이준익 감독과의 현장은 최 씨의 능력을 더 끌어올린 듯 싶었다.
“이번 작품은 일이 즐거웠고, 그래서 일을 찾아서 한 것 같다. 이준익 감독님하고 합(合)도 제일 잘 맞은 것 같다. 사실 스태프들에게 이 감독님 현장의 ''충무로의 마지막 남은 유토피아''라고 불린다. 작품할 때는 몰랐는데, 작품을 끝내고 나니 이 감독님은 허허실실 속에 숨겨진 날카로움을 지닌 것 같다. 겉으로 부드럽고 포기하시는 것도 빠른데, 뭔가를 요구할 때는 무조건 하게 만든다”
<평양성>은 이준익 감독의 2003년 영화 <황산벌> 이후를 그리고 있어, 인물들도 전작의 ''김유신'' 역의 정진영이 그대로 출연하고, 이문식은 두 번 군대에 입대하는 입장으로 나온다. <황산벌>과 마찬가지로, 지역별 사투리도 눈에 띈다. 80억이 투입되는 대작 코미디물이다. 이 작품에서 전체를 바라는 스크립터를 담당한 최 씨는 정작 하고 싶었던 일은 촬영이었다.
“영화를 많이 좋아했는데, 대학 4학년부터 독립영화하면서 배웠다. 그때는 연출도 했지만, 실은 촬영 쪽을 지원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할까 하다가 느낀 것이 누구나 자기 그릇이 있다는 것이다. 저는 감독할 그릇이 아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니까 작가는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궁극적으로 시나리오 작가를 생각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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