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Z 공연] ‘거미 여인의 키스’는 치명적이었다

[Ki-Z 공연] ‘거미 여인의 키스’는 치명적이었다

기사승인 2011-03-05 12:58:01

[쿠키 문화] 연극을 보는 묘미 중 하나는 배우들의 땀방울 하나까지도 모두 눈앞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은 물론 대형 뮤지컬에서도 접하기 힘든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진귀한 경험이 있다면 배우들과의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극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그 많지 않은 연극 중 하나다.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무대 장치까지 모두 관객들을 빨아들이며, 호흡을 같이 했다. 배우들이 숨을 멈추면, 관객들도 같이 멈췄다. 무대 위 두 배우가 서로를 느끼며 말한 대사와 대사 사이에는 관객들도 호흡을 멈췄고, 내뱉는 듯한 대사가 끝나면 관객석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극의 배경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빌라 데보토 감옥의 작은 감방이다. 이 공간에는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구속된 감성적 동성애자 몰리나, 다른 한 명은 반정부주의자 혁명가 발렌틴이다. 내용은 이렇다.

몰리나는 감옥 생활의 따분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발렌틴은 동성애자이면서 정치, 사상, 이념에는 전혀 관심없이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몰리나를 경멸한다. 몰리나 역시 차갑고 이성적이며 냉혈한 같은 발렌틴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몰리나는 자신의 가석방을 미끼로 감옥 소장으로부터 발렌틴에게 반정부조직에 관련된 정보를 캐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감옥에서 하루하루 기나갈수록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에 발렌틴은 빠져들어가게 되고 둘은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조금씩 미묘한 가정에 휩싸여 가게 된다.

물리나가 곧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에 발렌틴은 반정부조직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자신이 알게되면 혹시라도 소장에게 말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지 말아달라 청하게 된다. 서로의 진심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된 몰리나와 발렌틴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관객들의 시선은 어디에 두냐에 따라 연극을 보는 방향도 달라진다. 몰리나의 입장일 것이냐, 발렌티의 입장일 것이냐, 혹은 이념적 문제로 볼 것이냐, 동성애자의 시선으로 볼 것이냐 등등 연극 한편이 많은 시선을 제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몰리나에 대한 관객들의 시선이다. 애초 몰리나는 굉장히 코믹스럽게 그려진다. 자신이 봤던 영화 이야기를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모습이나, 발렌틴에게 구박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내뱉는 몰리나는 극을 유쾌하게 이끌어 간다.

그런데 극 중간에 몰리나가 감옥 소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인물임이 드러난 후, 몰리나의 태도에 대해 관객들의 반응 역시 싸늘해진다. 몰리나의 웃음과 행동에 대한 반응도 연극 초반과 달라진다. 여기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한차례 더 혼란을 겪는다. 자신들의 감정을 역행시켜놓은 몰리나가, 진심으로 발렌틴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 선 정성화, 최재웅, 박은태, 김승대 네 명의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관객들의 호흡을 이끌어냈고, 자신들의 호흡에 맞췄다. 유쾌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어 놨다.

이지나 연출은 ‘연출의 글’에서 과거 게이였던 자신의 친구가 연극에 투영됐다고 말하며 “이번 거미여인은 내가 친구에게 바치는 위로의 노래”라고 전했다. 그래서일까, 원작자인 마누엘 푸익의 작품이긴 하지만, 꽤 많은 부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치범, 동성애 등이 아닌,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한 영역에서였다. 4월 17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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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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