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Z 사람] ‘불멸의 연인’ 장국영, 2011년에도 추억되다

[Ki-Z 사람] ‘불멸의 연인’ 장국영, 2011년에도 추억되다

기사승인 2011-04-02 13:21:00

[쿠키 연예]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외 가수와 배우들의 사망 소식이 너무 많이 들려서인지, 이들에 대한 팬들의 추모는 의외로 오래 가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작품이나 음악의 인지도 여부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추억’을 남긴 스타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기도 하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죽음을 선택한 장국영 (장궈룽, 張國榮)은 이런 면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1주년부터 8주년까지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쉽게 식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 활동했고, 자살한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뿐만 아니라 한국도 매년 4월 1일에 “거짓말 같은 죽음”이라고 말하며 장국영을 기억한다.

◇ 직물왕의 집안에서 태어나 스타로…

장국영의 어릴 적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부유했지만, 내실은 불우했다. ‘홍콩의 직물왕’이라 불리는 집안의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이다.


21살인 1977년 홍콩 ATV가 주관하는 콘테스트에 우연히 나가서 2위에 입상, 가요계에 입문한 장국영은 가수로는 별다른 인기를 모으지 못했다. 그러나 1979년 영화 ‘열화청춘’으로 스크린에 데뷔,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으로 단숨에 스타 자리를 꿰찬다. 오우삼 감독 역시 이 작품으로 10여 년의 무명생활을 청산한다.

‘영웅본색’은 홍콩 느와르의 시초이자, 아시아 전역에 느와르 열풍을 몰고왔다. 한국 역시 이 시기 홍콩 느와르에 빠져 ‘영웅본색’과 유사한 홍콩 영화에 열광했다. 여기에 장국영은 영화 ‘천녀유혼’으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장국영은 1990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캐나다로 떠난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장국영이 1989년 도쿄콘서트에서 천안문 (텐안먼) 사태에 대해 인권을 무시하고 자유를 억압한 사건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가장 힘을 얻고 있다.

1년 동안 캐나다 생활을 하던 장국영은 홍콩으로 돌아와 연예계에 컴백 한다. 여기서부터 장국영의 연기 스타일은 한층 달라져있었다. 이전까지 ‘꽃미남’ 느낌의 아이돌 스타였다면, 이후에는 ‘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성장을 하게 된다.

그 시작이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리는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다. 영화에서 트렁크 팬티를 입은 채 맘보춤을 추던 장국영은 이 영화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홍콩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이후 1993년 ‘패왕별희’와 1997년 ‘해피투게더’를 통해 장국영은 느와르 영화에서 보여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연기로 팬들을 사로잡게된다. ‘패왕별희’는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장국영은 아시아권을 탈피해, 서양권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다.

◇ 장국영, 동성애자 여부 논란

1996년 장국영은 아시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한 콘서트에서 자신의 연인이 남자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의 유서에 나오는 ‘당당’은 그와 17년 이상 함께 동거해온 은행원 출신의 ‘당학덕’이라는 남자로 밝혀졌다. 당학덕은 장국영이 사망한 뒤, 그의 유산 460억을 물려받았다.

당시 홍콩 언론은 장국영의 동성애에 대해 거론하면서, 그가 영화 ‘패왕별희’와 ‘해피투게더’에서 연기한 동성애자 연기가 사실적이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2007년 장국영의 생전 인터뷰를 모은 책이 한권 출간되면서, 논란을 일으킨다. 일본 여성 작가 시마 씨가 발간한 이 책 내용에서 장국영은 동성애에 대해 “나는 절대 동성애자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물론 중국 언론들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한국을 사랑한 장국영, 장국영을 사랑한 한국

장국영은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77년 첫 앨범을 발표하며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장국영은 1979년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초청가수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다.

이후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에서 배우로 한국 팬들과 만난 장국영의 인기는 가히 대단했다. 당시 한 초콜릿 광고에 출연했는데, CM송으로 삽입된 자신의 곡 ‘To You’는 속칭 ‘대박’을 냈다. 광고 방영시간을 묻는 전화가 방송국에 쇄도할 정도였다.

장국영이 지금껏 한국의 팬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80~90년대 한국사회의 어두운 터널을 거쳐오는 과정에서, 이를 대변해주는 정서적 교감을 장국영에게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 수많은 감독들이 고등학교 시절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을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에는 두 영화의 ‘교집합’인 장국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송희일 감독은 과거 장국영을 추억하며 “마법처럼 홀연히 나타나 우리 삶을 흔들어 놓은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기억은 그것 자체로 소중한 일일 겁니다”라며 “그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불멸의 연인’으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불멸의 연인’을 우리는 그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의 노래를 듣는 것으로 2011년에도 추모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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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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