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영화] 홍상수 감독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에 영화과 교수 보람 역으로 등장하는 송선미의 모습은 근래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생소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지적이고, 차분하며 어느 때는 우울한 느낌마저 방송 드라마에서 보여준 송선미 이기에, 영화 속 이미지는 일면 ‘변화’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러나 송선미의 데뷔 이후 연기 변화를 생각하면, 이번 ‘북촌방향’에서 송선미의 모습은 ‘변화’가 아니라, ‘회귀’다.
“지금까지 제가 보여드리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죠. 아마도 어떤 제약 없이 편안하게 연기를 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보인 것 같아요. 사실 방송 드라마에서는 어떤 선을 긋고 가야하잖아요. 시청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의 두세 가지 성격만 가지고 가니까요. 홍 감독님은 같은 장면이라도 그때그때 느껴지는 대로 연기하게 하니까, 여러 가지 모습이 한꺼번에 나온거죠. 그래서 그런 저의 모습을 보고 애교스럽다, 유혹적이다, 털털해보인다고 생각하신거죠. 하지만 드라마에서의 제 모습도 사실 30대 전후로 달라요. 제 어렸을 때 작품을 많이 본 사람들은 제가 발랄하고 푼수같은 느낌을 가졌다면, 30대 이후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조신하고 참하고 비련의 느낌을 주는, 뭔가 사연 있는 여자같이 느끼더라고요.”
홍 감독의 ‘북촌방향’은 극장가에서 커다란 반응을 얻고 있다. 겨우 25개관에 불과한 상영관을 찾은 이들은 무려 3만 명을 넘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상망, 9월 24일 기준). 5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송선미가 마지막에 찍은 영화는 홍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다. 홍 감독과 같이 작업을 한다고 해서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배우로서 좀더 상업성 짙은 영화를 해고픈 마음도 있을 법했는데, 그는 홍 감독 영화를 선택했다. 아니 정확히는 선택받았다.
“‘해변의 여인’을 홍 감독님과 작업할 때 굉장히 좋았어요. 감독님께 좋은 영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감독님을 만났는데, ‘북촌방향’ 참여를 제의하셔서 다시 같이 작품을 하게 됐죠. 사실 전 한번 해봐서 홍 감독님 스타일을 아는데, (김)상중 선배는 처음 홍 감독님이랑 해서 그런지, 현장에서 오셔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정보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 상중 선배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한편으로 재미있었어요. 저는 익숙했던 것 같아요.”
그는 홍 감독의 작업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이다. 잡다한 장치도 없고, 오직 감독과 배우 그리고 이를 연결할 카메라만 존재하는 그 공간에 대해 송선미는 “갖출 것은 다 갖추지 않았냐”고 말한다. 스타로서의 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의 발언이다.
“전 오히려 그런 상황이 좋아요. 사실 영화 촬영 현장에 그렇게만 있으면 되는데, 다른 현장을 보면 곁가지가 너무 많이 붙잖아요. 전 감독님이 불필요한 것들, 군더더기를 없애고 촬영을 진행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딱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 같죠.”
홍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의 남자들처럼 ‘북촌방향’에 나오는 김상중과 유준상도 ‘찌질함’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기적이다. 자기의 목표를 위해 여성과 단 둘이 있을때는 입발린 소리를 서슴없이 하면서도,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도도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합리화시킨다. 남자 관객들이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다. 송선미도 ‘북촌방향’시사회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은 찌질하다”고 평가했다.
“그런 찌질한 모습도 사실 우리들 모습 중 하나죠. 단지 자신에게 그 찌질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그렇다고 생각을 안할 뿐이죠. 제3자 입장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런 찌질한 면을 모두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감독님에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특별히 찌질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아요. 사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영화처럼 말을 하잖아요. 또 여자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니까, 그 말에 넘어가는 것이고요. 안다면 그렇게 대응하지 못하죠.”
‘북촌방향’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가 지속적으로 보여지지만, 그게 동일한 것인지 연결된 것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홍 감독 특유의 불친절한 영화다. 관객에게 미묘한 차이를 알아서 찾아내라고 말한다. 기승전결이 분명치 않기에, 배우들도
혼란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 감독님의 영화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하면 기승전결이 분명한 친절한 영화를 보면 되죠.(웃음) 사실 현장에서는 그런 생각 안하고 그냥 찍었어요. 촬영 현장에서 뭐든 바로 결정이 되니까요. 영화를 봐도 시간의 개입이 정확하지 않잖아요. 전날인지, 꿈을 꾼 것인지. 그것처럼 저희도 촬영할 때 날짜의 개념을 물어보면, 감독님이 ‘허허허’하면 넘어가면서 그냥 찍었어요.”
송선미는 1996년 슈퍼모델대회를 거쳐 1997년 드라마 ‘모델’로 데뷔한 이래 벌서 14년째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정도 연차가 되는 연기자들은 스스로 연기의 영역과 폭, 질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송선미가 선택한 기회는 ‘사람’이다.
“저도 사람을 보고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하고 일을 하면 결과가 좋은 것 같고, 설사 결과가 안 좋더라도 이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고요. 아무리 반응이 좋아도 안 좋은 사람들하고 작업을 하면 작업하는 순간의 불편함 때문에 왜 사는지 모를 정도의 생각도 들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 사진=이은지 기자 rickonbge@kuki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