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비밀’에서 비밀 가진 남자 연기 돋보여
“액션의 정석 연기하고파…노출에도 스턴트는 없다”
[쿠키 영화] 영화 ‘사물의 비밀’의 시사회가 있었던 날, 두 시간 반 앞서 ‘너는 펫’이 먼저 기자들을 만났다. 배우만 봐도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블라인드’)에 빛나는 김하늘에 한류스타 장근석이 주연을 맡은 ‘너는 펫’이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장서희와 신예 정석원의 ‘사물의 비밀’에 비해 이목을 끌었고 그에 비례해 시사회 참석자의 수도 ‘너는 펫’ 쪽이 월등했다.
같은 날 열린 두 개의 시사회, ‘사물의 비밀’이 독특한 웃음과 신선한 충격은 반전이라 부를 만했다. ‘사물의 비밀’마저 실망스러우면 상한 기분을 가셔 줄 영화 한 편을 더 보리라 마음먹었으나 불필요한 대비였다. 참신한 스토리에 탄탄한 짜임새, 장서희 윤다경 김경익 등 중견배우들의 다부진 연기…, 영화에 대한 만족도를 더욱 높여 준 것은 기대치 않았던 정석원이라는 배우의 발견이었다.
드라마 ‘오작교 형제들’ 출연으로 바쁜, 신인이다 보니 대기시간이 많아 짬을 내기 힘든 정석원에게 인터뷰를 신청해 놓고 촬영이 없는 날을 기다려 지난 18일 서울 압구정동 카페에서 만났다. 배역의 옷을 벗겨내니 더욱 돋보이는 이목구비, 선한 웃음, 착실한 자세와 배우로서의 열정이 인터뷰 시간을 뜨겁게 데우는 에너지로 작용했다.
“너무 재미있어 단숨에 읽었다”
영화 ‘사물의 비밀’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편과 별거 중이지만 저명한 작가이자 교수로서의 체면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여자 이혜정(장서희 분), 나이답지 않은 반듯한 태도와 인간미를 지닌 스물한 살의 대학생 이우상(정석원 분), 이혜정 교수실의 복사기 ‘남자’(이필모 목소리), 이우상의 디지컬 카메라 ‘여자’(심이경 목소리)가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모두 비밀이 있는데, 이혜정은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풀고 있고, 이우상은 대학에 다니는 것 외에 또 다른 일을 야간에 하고 있으며, 복사기는 혜정의 치부까지 알고 있지만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고, 카메라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우상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다.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너무나 신선한 거예요.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단숨에 읽었어요. 나만 재미있나 싶어 동생이랑 회사 분들에게 읽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다들 재미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신인이다 보니 할까 말까를 고민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당시 연기에 목말라 있던 저로서는 하고 싶다 아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영화로 만들어지니 시나리오랑 또 달라요. 카메라나 복사기는 어떻게 표현될까 싶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표현돼 좋았고요. 촬영 현장과 또 다른 편집의 위력도 배웠습니다.”
“아기처럼 공놀이 하며 우상이 만나”
영화를 보면 정석원이 연기한 이우상은, 마치 이우상이라는 실제 인물이 있고 그 정신이나 이미지가 정석원의 몸을 빌어 표현된 것처럼 구체적이고 리얼하다. 이영미 감독의 글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임을 상기하면 그 생생함은 놀랍다. 결과는 보이지만 지켜볼 수 없었던 탄생 과정이 알고 싶었다. 정석원은 그 공을 전적으로 이영미 감독에게로 돌렸다.
“제 안에서 우상이를 찾아내는 건 아주 힘든 과정이었어요. 감독님께서는 촬영 3개월 전부터 저를 우상이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하셨는데요. 저도 제대로 연기하고 싶었기에 적극적으로 임했음에도 한동안은 정말 이게 뭐하는 건가, 촬영을 시작하기는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선 작업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은 작은 방에서 아이처럼 공을 가지고 놀라고 하세요, 그러다가 공을 엄마로 인식하고 울어 보라고 하시고요. 정말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더라고요.”
“그렇게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전화를 거세요. 우상이의 피부는 어떤 빛일까, 머릿결은 어떨까, 손톱길이는 어느 만큼일까를 물으셨고 생각하게 하셨죠. 그렇게 함께 우상이를 만들어 갔어요.”
“아직은 표현이 부족한 제 안에서 우상이를 찾아내고, 우상이가 될 수 있게 하는 과정임을 그 때도 어렴풋이 알았고, 또 영화를 보면서 충분히 깨달았죠. 헛된 작업이 아니었구나, 나 혼자였다면 저렇게 연기할 수 있었을까 하고요. 기자님처럼 그걸 알아봐 주시는 관객을 만나면 역시 맞는 길이었구나 확신도 얻습니다.”
“누나가 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해…라더니”
상대역은 장서희가 맡았다. 정석원이 먼저 캐스팅된 후, “여주인공은 무조건 톱(top) 배우, 연기 잘하는 배우로 간다”는 감독의 설명을 들으며 기다린 상대다. 내로라하는 40대 여배우들에게 시나리오가 건네졌고 모두에게서 “신선하고 재미있다”는 답변이 왔지만, (정석원의 설명대로라면) 때로는 정석원이 너무 인지도가 없어서 까이고 때로는 스케줄이 안 맞아서 어긋나기도 했다.
“장서희 선배와 연기하며 정말 많은 걸 느끼고 배웠어요. 매사 철저히 준비하고 노련하게 연기하고, 정말 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에서 잠든 우상이 어깨를 잠시 빌려 기댔다가 제가 떠나자 곰 인형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어요. 슛 들어가고 하나, 둘, 셋…, 정말 딱 3초 만에 눈물을 뚝 흘리시더라고요. 저는 눈물 한 번 흘리자면 온갖 감정을 다 끌어와야 하는데요. 제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물었더니 ‘석원아, 그건 배우의 기본이야’라고 답하셨죠. 선배가 크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련한 배우 장서희도 작은 여인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키스 신에서였는데요. 촬영 전에는 ‘석원아, 누나가 동생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하다’ 이러며 여유를 부리시더니 막상 키스가 시작되려 하자 덜덜 떠시는 거예요. ‘연기 인생 30년에 이런 딥(deep) 키스는 처음이야. 안 되겠다 너한테 맡길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더니 인간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유일하게 제가 리드해서 찍은 장면이었습니다.”
우상의 눈물, 보셨나요?
정석원은 장서희와의 연기 호흡이 가장 좋았던 촬영으로 교수실에서 뺨 맞는 장면을 꼽았다. 우상의 비밀을 알게 된 혜정의 냉랭한 태도에 우상도 혜정의 비밀을 터뜨리는 절정의 순간이다.
“정말 바랐던 대로 뺨을 제대로 치셨어요. 얼굴이 훽 돌아갈 정도였죠. 얼얼한 뺨을 느끼며 우상의 감정에 몰입했어요. 화면에 잘 안 보이지만 반쯤 가려진 쪽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요. 그렇게 맞았기에 방문을 나서기 전 그 독한 말을 던질 수 있었고요. 그 마지막 말이 그저 비난으로만 들리지 않으려면 우상이의 눈물이 중요한데 보이던가요?”
장서희는 노출 연기가 더 있는데, 열심히 찍었는데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다며 아쉬움 아닌 아쉬움을 표했다. 횟집 여주인으로 분해 파격적 노출 연기를 멋지게 소화한 배우 윤다경 역시 노출 연기를 꺼리면 배우로서 당당하지 못하다는 말을 남겼다. 액션연기에 가장 자신 있고, 제대로 알고 하는 액션배우를 꿈꾸는 정석원은 대학으로나 일로나 자신의 전공인 액션에 빗대 노출 연기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다.
“스턴트로 치면 대역 쓰면 안 되죠. 너무 위험해서, 배우가 다쳐서 전체 촬영 일정에 지장 주고 영화에 피해 줄 것 같을 때만 대역 쓰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출이라고 예외일 수 없죠.”
한국형 액션 전사의 탄생을 기대하며…
액션을 얘기하니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안정적 횟집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횟집 여자를 만나러 가는 장면. 여자가 사는 주공아파트 주차장에서 먼저 도착한 혜정이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오토바이, 검은 가죽재킷을 입고 혜정에게 다가와 서는데 다름 아닌 우상이다. 혜정이 우상에게서 ‘남자’를 발견하는 장면이자 우상이 감춘 비밀의 일면이 살짝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러한 본연의 기능을 다하고도 또 하나의 효과를 발한다. 단순한 동작인데 오토바이를 몰고,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몸짓이 남다르다. 그 부분만 떼어내면 액션영화의 한 장면이다.
“스턴트맨으로 살고 있었고 무술감독이 꿈이었어요. 대학을 선택한 기준도 딴 것 없이 정두홍 무술감독께 배울 수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고요. (경기도) 파주 옥탑방에서 살면서 버스 타고 나가 운동하고 다시 버스 타고 집에 가고, 그렇게 살던 제가 배우가 됐어요. 요즘 한창 연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고, 목숨 걸고 무술 배우고 무도에 정진했듯 또 그렇게 열심히 연기해야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지만, 기회가 되면 제대로 하는 액션 연기를 보여 드리고 싶어요. 칼 잡고 버티고 서는 것 하나, 베는 것 하나, 베는 동작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 운동한 사람은 정말 다르거든요. 또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소울(soul) 있는 액션을 하고 싶습니다. 영화 ‘해바라기’에서 김래원 선배가 보여 주신 액션처럼, 남자의 분노와 슬픔이 묻어 있는 그런 진짜 액션을 하고 싶어요.”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드립니다”
끝으로 관객이 영화 ‘사물의 비밀’을 봐야 하는 이유를 부탁했다. 배우 정석원의 답은 간결하고도 힘 있다. 현실의 삶이 말의 등(背)을 대 주고 있으니 그러하다.
“저희 영화는 사랑에 관한 얘기예요. 모스크바영화제나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주목한 이유도 국경이나 나이, 직위나 종교를 넘어 모두가 사랑할 수 있고 문화나 언어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물의 비밀’은 어쩌면 그 중에서도 ‘나이 차’에 대해 말하는 영환데요. 저도 지금 연애를 하고 있지만 나이 차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에게 맞춰 가게 되더라고요. 사랑에 대한 용기를 드리는 영화입니다, 보시고 주저하던 사랑을 하실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