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당신은 이범학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네”라고 바로 답한다면, 둘 중 하나다. 나이가 적어도 30대 중반 이상이거나, 90년대 음악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범학이라는 존재는 몰라도 ‘이별 아닌 이별’이라는 곡명이나, ‘내 사랑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 행복을 바라는 내 맘은~’이라고 흥얼거려 주면 나이에 상관없이 “아 그 노래”라는 반응을 보인다. 청자(聽者)가 어떻게 이 노래를 듣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긴 생명력을 가진 곡이라는 것이다. 그 곡의 주인공 이범학이 20년 만에 돌아왔다.
한 달 전인 지난 3월 16일 트로트곡 ‘이대팔’을 들고 온 이범학에 대한 올드(Old) 팬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발라드 왕자’ 느낌이었던 이범학이 트로트를 들고 나온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었다. ‘내 사랑 굿바이 굿바이’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들려주던 이범학도 세월에 어쩔 수 없이 무너지나보다라는 반응도 있었다. 혹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이범학의 데뷔 당시 활약을 언급해보자.
1991년 이범학의 데뷔곡 ‘이별 아닌 이별’은 발표하자마자 커다란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범학은 당시 음악 순위 프로그램 KBS ‘가요톱텐’에서 1위 후보곡에 오른다. 지금이야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한다고 해서 대중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시 ‘가요톱텐’에서의 1위는 가수 본인이나 대중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정말’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노래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프로그램에서 신인인 이범학이 단숨에 1위 후보곡에 오른 것은 물론, 1위의 기쁨도 맛본다. 경쟁곡은 신승훈의 ‘날 울리지마’. 그러나 바로 다음 주에 신승훈에게 1위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다시 한 주가 지나, 이범학은 다시 1위에 오르더니, 5주 연속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가요톱텐’ 규정상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 더 이상 방송에 나올 수 없기에 그쳤지, 이범학의 돌풍은 사실상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다음해인 1992년 이범학은 앨범 하나를 내고,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활동을 즐기고 있는 이범학과 인터뷰 자리에서 이 같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자, 이범학은 고개를 저었다. 최정상을 단숨에 찍고, 다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톱가수’ 이범학이 싫어하는 말이 ‘왕년에’였기 때문이다.
“결과로 보면 한번에 모든 것을 다 겪었죠. 그래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왕년에’라는 말이에요. 그 ‘왕년’ 가지고 언제까지 살아갈까요. 과거 지향적인 삶은 너무 싫어요.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니까요. 난 아직 과거를 먹고 사는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죠. 20년을 방송 활동도 안하고 버틴 것이 (음악을 하겠다는) 마지막 남은 희망 때문이죠. 뒤에서는 사람들이 참 끈질기다고 하는데, 그게 무대 밥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자존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내가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세상에 한번 내보내고 싶고, 가수로 표현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죠.”
가수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내보내고 싶었던 생각은 20년 동안 묵히고 또 묵혀졌다. 오랜 시간 모습을 안 보이다가 이번에 앨범을 내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이범학은 대뜸 “그냥 내 길이기 때문에”라며 자신이 가수에 대한 열망이 고등학교 때부터 얼마나 컸는지를 설명했다. 가수, 음악이란 단어가 지속적으로 거론하며 이야기할 때, 이범학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고2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고, 이것만이 내 길이라 생각했어요. 다른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죠. 대학에 간 이유도 당시에는 가수가 되는 길이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가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죠. 사실 부모님은 법관이 되길 바라셨어요. 제가 공부 좀 했다는 이야기죠.(웃음) 아무튼 대학 전공도 가사를 쓰기 위한 전공을 고민했어요. 원래 영문과 등에 지원했는데, 경쟁률이 센 과를 선택하다가 삼수까지 하게 됐죠. 그러다가 깊이 있고 심도 있는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조금 낮은 과를 생각하다가 철학과를 가게 되었어요.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데, 교수님이 왜 철학과를 선택했냐고 물으시는데, 전 가수가 되고 싶어서 철학과에 오게 되었다고 하니 놀라시더라고요. 나중에 합격한 후에도 참 특이한 놈이라고 말하시더라고요.(웃음) 노래를 하고 싶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해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번에 앨범을 다시 내게 된 계기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틈이 없었던 거죠.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지금 저한테 ‘이대팔’은 배수의 진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이게 안 되면 가수의 꿈을 접어야 되나라는 절박한 심정도 있고요. 이제 나이도 있고 가정도 있으니까요. 20년 동안 준비했던 발라드 대신 트로트로 바꾸었다는 것 자체가 내 뒤에 물이 있다는 절박함이 있는거죠.”
발라드로 데뷔해, 정점을 찍은 입장에서 트로트 가수로의 변화는 팬들의 의아함도 낳게 했지만, 본인 역시 고민이 많았을 터였다.
“많았죠. 그리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제가 발라드를 접은 게 아니에요. 배수의 진을 친 것은 뒤 쪽이지, 앞은 아니잖아요. 앞으로는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서 한 마리도 못 잡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동안 준비했던 발라드 곡들을 발표하고 싶죠. 그렇게 된다면 저에게는 발라드에서 트로트라는 레퍼토리가 하나 더 추가된 거죠. 투수로 따지면 직구만 던지다가, 커브란 구종이 추가된 거죠.”
트로트 가수로 성공한 후 의외의 상황을 이범학은 맞이해야 한다. 이범학이 자신의 주 전공인 발라드를 발표할 경우, 이범학을 잘 모르는 어린 세대에게는 ‘트로트 가수가 발라드 곡을 낸다’는 선후가 바뀐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저도 고민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만약 트로트 가수로 인식이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거였죠. 지금 제 입장에서는 어떤 특별한 앨범과 노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몇 년 뒤에 제 주종이 트로트가 되고, 부업이 발라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죠.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제 자체가 주업, 부업을 생각을 안 하는 타입이더라고요. 마음 편하게 저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거죠. 욕심일 수도 있지만요.”
이범학의 이번 앨범은 바이브 윤민수-류재현이 힘을 보탰다. 윤민수는 타이틀곡 ‘이대팔’을 작사 작곡했고, 류재현은 이범학의 대표곡인 ‘이별 아닌 이별’을 록 버전으로 편곡했다. 이범학 소속사 대표가 류재현의 사촌 형이라는 인연도 있었지만, 음악 선배로서 바이브의 적극적인 참여도 있었다.
“곡 반응이 너무 좋아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이범학이 20년 만에 발라드가 아닌 트로트를 낸다고 했을 때, 트위터 등에서 반응이 ‘왜 하필이면’이었어요. 이 다섯 글자에 여러 가지 뜻이 있잖아요. 그것을 보면 안 좋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다르게 보면 저한테 어찌됐든 관심이 있다는 거죠. 관심이 없었다면 저런 반응조차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 노래를 듣고 다시 며칠 뒤에 올린 글들은 ‘노래 좋아요’ ‘대박날 것 같아요’ 등이에요.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좋아서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20년 만의 앨범, 그리고 방송 출연. 이를 누구보다도 좋아할 사람은 누가 뭐래도 가족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제 12살 된 딸의 자랑스러움은 남다르다. 학교에서 아버지가 가수라고 해도, 알아주는 친구들이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딸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중에서도 이범학을 아는 이들은 중견 선생님들 이상이다. 이번 활동이 남다른 이유다.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가수라고 자랑을 했대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를 모르고, 그 선생님 세대도 저를 잘 모르니까, 상처를 받았나 봐요. 그래서 저한테 방송에 언제 나가냐고 그랬어요. ‘세바퀴’에 나갔는데, 그동안 ‘이대팔’ 노래를 했을 때 아빠 목소리 이상하다고 말한 애가 이제는 노래를 따라 해요.(웃음) 우리 아이가 꿈이 가수인데, 아빠처럼 발라드가 아니라 댄스 가수가 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제가 반대를 하고 있어서, 저한테는 말을 못하죠. 제가 가수를 해봤기 때문에 아이에게 가수를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연예계는 1등만이 버티잖아요. 다른 직업들은 10등을 해도, 20등을 해도 버틸 수 있는데, 연예계는 20등 하면 연예인 생활 끝나는 거거든요. 그게 주위에서 보기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 거예요. 제가 나오자마자 1등 한 것은 운이 좋은 케이스이고, 하늘이 준 선물인데 우리 아이에게 그런 선물이 온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래서 반대하고 있어요. 물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지금은 아빠로서의 바램이죠.”
이범학과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 트로트 가수 이범학의 경쟁상대는 20년 전 발라드 가수 이범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모습을 잊게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저랬는데, 지금은 이렇다’라는 평가부터 없애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1년 전 이범학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이범학을 이기려면, 같은 방법(발라드)으로 접근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예전과 똑같으면 예전의 이범학과 다를 바 없다는 거죠. 사람들이 ‘예전에’에 라는 말 대신, 지금의 ‘이범학’을 사랑해주셨으면 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명준 기자 neocross@kukimedia.co.kr / 트위터 @neocross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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