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그가 웃는다. 드라마 ‘닥터 진’에서 오열하던 김재중이 웃는다. 집 앞 슈퍼에 가는 동네 청년처럼 민소매 티셔츠에 카모플라주(개구리무늬 군복) 반바지를 입고 웃는다.
“더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인터뷰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말이다. 옷차림이 가벼워지니 대화가 솔직해진다. 사진 대신 시원한 미소를 제공한 인터뷰가 6일 오후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종사관 김경탁을 연기하며 배운 ‘비움에서 오는 여유’가 옷차림에, 그의 말투와 생각에 배어 있다.
“멋 부리다 연기 놓쳐”
“처음부터 연기를 한 게 아니라 가수로 데뷔해 연기에 도전해 보는 식으로 시작하게 됐잖아요. 그게 제 연기에 걸림돌이 됐던 것 같아요. 가수로서 완벽히 준비된 모습을 무대에서 보여드리는 게 습관이 돼서 카메라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리려 했던 것 같아요. 멋있어 보이는 데 마음을 쓰니 연기가 제대로 될 리 없잖아요.”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 방영 당시, 누리꾼들은 김재중이 연기한 차무원이 등장하는 장면은 아무데서나 화면캡처를 해도 ‘그림’이라며 탄성을 냈다.
“맞아요, 멋지게 보이려고 애썼어요. 연기할 때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버려야 오히려 더 멋있어 보인다는 걸 그땐 몰랐던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연기했을까 후회돼요.”
나를 버리니 연기가 보인다
후회를 교훈 삼아 정진한 덕분일까. ‘닥터 진’ 속 김경탁을 보노라면 처음부터 캐릭터를 정립하고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변화하는 내용과 장면에 맞는 연기를 그때그때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미 인물의 중심을 잡고 드라마 안으로 들어가, 달라지는 상황과 관계에 반응하는 김경탁의 선택과 감정, 의지를 드러낸다. 일본 드라마계에서 ‘연애의 신’으로 불리는 작가 기타가와 에리코가 주목한 바 있고, 기존의 출연작 영화 ‘천국의 우편배달부’와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 등에서 안정감 있는 연기를 확인한 바 있음에도 새로이 주목하게 되는 호연이다. 정통사극 연기를 잘하기란 기성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인데 합격점을 받은 셈이다.
“과거 했던 연기들을 다시 보면 제가 보여요. 캐릭터나 장면에 상관없이 김재중을 심어 놓은 거죠. 이번에는 본연의 나를 버리자는 생각으로 김경탁에 임했어요. 물론 다 버리고 시작한 줄 알았는데 방영 초반 미처 못 버린 ‘미련’이 묻어났지만요. 아마 버리고 싶지 않은 부분,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부분 때문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내 저를 버리고 경탁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고, 몰입하다 보니 내가 지금 어떻게 보여 지는가에 대해 계산할 틈도 없이 전쟁터에 선 병사처럼 치열한 싸움을 치렀네요. 자평컨대, 전부는 아니지만 본연의 저를 많이 버리고 김경탁이 됐었다고 봅니다.”
“경탁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사람을 보는 인물”
안동김씨 60년 권문세도정치의 마지막 주자로 그려진 좌의정 김병희(김응수)의 서자 김경탁의 인생길은 고단하다. 그에게 있어 효의 길은 정의와 길을 달리하고, 진심으로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 자칫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갖은 악행을 일삼는 비열한 종사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뺏긴 여자를 단념하지 못하는 오기 어린 사내로 비치기 십상인 캐릭터이다.
하지만 김재중은 김경탁을 가는 길이 다르고 방법이 다를 뿐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인물, 자신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의리의 인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떤 것들에 주안점을 두고 연기한 결과일까.
“이하응(이범수)이나 진혁(송승헌)이나 홍영휘(진이한) 같은 캐릭터들은 품은 사상 자체가 커요. 세상을 향한 욕심과 꿈이 큰 인물들이죠. 반면 경탁이는 ‘내 사람은 내가 지킨다’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단순하다는 건 불순한 의도, 과욕이 없다는 뜻이고요. 또, 다른 캐릭터들이 세상을 본다면 경탁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봐요. 따라서 저는 제가 지키는 상대, 아버지와 영래(박민영)와의 1:1 감정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죠. 다른 분들에 비해 표현하기 쉬웠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김응수, 허세와 가르침 없는 배우
겸손이다. 이야기의 가장 중심에 선 인물이 아니면서도 김경탁의 스토리를 시청자에게 각인시키고 내면의 감정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다. 아버지 역의 김응수와 함께 김재중은 인생에 대해, 권력에 대해, 가족에 대해 그 본질을 곱씹게 했다.
“특히 (김응수) 선생님과의 연기 호흡이 좋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장면에서도 선생님 표정을 보며 리액션만 해도 절로 오열이 될 정도로 연기가 좋으세요. 덕분에 눈물에 콧물에 침에 땀에, 몸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액체를 한데 쏟아냈지만요(웃음).”
“더 좋은 건 상대의 연기를 존중하신다는 거예요. 허세나 가르침이 없으세요. 후배니까 ‘너, 이거 이렇게 해라’ ‘그거 안 좋다’ 그러지 않으세요. 그의 스타일이겠거니 받아 주시는 분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잘하게 끌어올려 주시는 선배세요. 사극이라는 장르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얻었는데, 선생님 하시는 거 보면서 그 자체로 배운 것 같아요.”
“낯선 것이 주는 스트레스 즐겨…다양한 연기 하고파”
건네는 얘기 하나하나에 연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묻어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강함 속에 부드러움이 녹아 있는 외모와는 달리, 나긋나긋한 말투 속에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발톱을 드러내며 강인함을 과시한다.
“단점을 감추는 건 되레 쉬운데 장점을 드러내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계속 단점을 버려 가고 장점을 쌓아 가야 좋은 연기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 사극에서 얻을 것을 배웠듯이 다양한 장르를 통해 새로이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요. 다양한 연기를 해 볼 수 있다면 굳이 주연이 아니어도 좋아요. 작품이 좋고 캐릭터가 좋다면 (작품) 규모가 작아도 좋고요. 새로 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네요. 낯선 것이 주는 스트레스 받는 걸 좋아해요. 하나하나 잘 해낼 때의 만족감, 도전을 하고 나서의 희열도 좋고요. 길게 오래 하고 싶습니다. 너무 빨리 이루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봐요. 천천히 하나씩 해내고 싶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