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님’이라는 극존칭을 써가며 자신을 지칭하고, 부스스한 외모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병원을 헤집고 다닌다. “니들 뭐하는데”라며 참견하기 일쑤고, 후배에게 “응급실의 비주얼 담당”이라는 아부를 하게 만들고는 흐뭇해한다. 비호감으로 비춰지기 십상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정감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우 김기방은 요즘 MBC 월화드라마 ‘골든타임’에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3년차 김도형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개성 넘치는 연기는 물론 김기방의 독특한 말투와 깨알 재미를 더하는 대사까지 곁들어져 드라마 인기에 큰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더벅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커다란 안경까지, 아무리 독설과 타박을 한다 해도 그의 ‘비주얼’은 유쾌함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보인다.
“요즘 길에서 많이들 알아봐주세요. 초반 방송에서는 시청률이 그리 높지 않았는데, 갈수록 인기가 많아지더니 요즘에는 온라인에 올라오는 ‘골든타임’ 패러디물을 보는 재미도 커요. 유행어처럼 제 대사가 화제가 되기도 해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처음 대본을 보고‘나님’이라는 대사가 어색하게 느껴져 빼야하나 고민했는데 이렇게 많이들 기억해 주시다니요. 감사할 따름입니다.(웃음)”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응급의학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긴박하게 풀어내는 ‘골든타임’은 삶과 죽음이 동반하는 응급실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턴 의사의 성장기이자,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확인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 의료계의 세태를 반영한 신랄한 현실 풍자, 시의 적절한 소재, 배우들의 열연 등으로 월화극 정상을 지키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과 ‘뿌리 깊은 나무’ 등을 통해 얼굴을 알렸던 김기방에게는 이번 드라마가 그간 맡았던 배역 중 가장 엘리트에 속한다. 의사 역에 캐스팅돼 처음에는 의아했다는 그는 “엘리트적인 이미지가 아닌데, 왜 나를 캐스팅했는지 처음에 진짜 많이 궁금했다”라며 “오디션도 없이 감독님이 직접 전화를 주셔서 출연 제의를 받은 것도 신기했다”라고 말했다.
“시놉시스만 보면, 자신의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이 뭐하는지는 전혀 상관 안하는, 전형적인 이기적이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의사였어요. 소리만 지르고, 의사로서 하는 일이 뭔지 알 수가 없었죠. 처음에는 의사 역을 맡게 돼 좋아하면서 ‘드디어 나도 엘리트적인 이미지로 변신하는구나’ 했는데, 캐릭터를 만들어가다 보니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인물이 그려졌어요.(웃음) 얄미울 수도 있는데, 일을 열심히 하고 순수하고 여린 친구예요. 겁도 많고.”
왠지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할 것만 같은 외모지만, 알고 보면 ‘서울 토박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평양 사투리로 연기를 했고, 이번 ‘골든타임’에서는 부산 사투리를 구사 중이다. 외국어만큼이나 어려운 사투리 대사에 고민도 많았다. 그는 “사투리에 의학 용어까지 겹쳐 대사 전달도 안되고 어색하기만 해 초반에 힘들었다”라며 “완벽한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감정 전달 위주로 방향을 바꿨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고 털어놨다.
“요즘에는 많은 영화, 드라마들이 부산을 배경을 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부드러운 표준말보다는 억양이 있는 부산 사투리가 임펙트가 강해 많이들 좋아하시는 것 아닐까요? 부산에서 촬영하다보면 현지 분들이 ‘꽤 하데?’라며 제 사투리 연기에 응원을 해주시기도 합니다.(웃음) 그래도 아직 어려운 것 투성이에요. 알파벳 E와 숫자 2는 똑같이 발음이 ‘이’지만 음의 높낮이가 달라요. 현지 분들도 그냥 습관화로 말을 하기 때문에 설명을 해달라고 하면 잘 모르시더라구요.”
‘명품 조연’이 주목받는 요즘, 연기 내공이 충만한 연극배우들이 조명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김기방을 연극배우 출신으로 오해하는 일도 많다. 또한 데뷔한 지 10년은 족히 넘은 중견 배우로 잘못 기억하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하지만 그는 연극 무대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우연히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데뷔 연도는 2005년으로, 그간 출연한 작품이 10여 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늘 오랫동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유는, 김기방 특유의 친근함과 정감 어린 이미지 때문은 아닐까.
데뷔한 계기조차 김기방답게 엉뚱하고 재미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했던 그는 20대 중반이 되자 점차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됐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기 시작했다. 인생과 현실에 대한 푸념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는 우연찮게도 방송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었다. “심심하면 촬영장에 구경올래?”라는 친구의 말에 다음 날부터 김기방은 드라마 촬영 현장에 출근 도장을 찍게 됐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냥 하루 이틀 촬영장에 가다보니 스태프들과 친해지고, 나아가 배우들과도 친분을 쌓게 된 거죠. 그러다가 감독님이 제 끼를 알아보시고는 연기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하셨고, 그렇게 우연히 연기를 하게 됐어요. 정말 제가 배우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죠. 참 행복해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게 내 직업이 됐다는 것이 신기하죠.”
처음에는 그의 정체를 두고 말도 많았다. 현장에 늘 있지만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던 것. 그래서 그를 스태프로 알거나 매니저로 오인하는 이들도 많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고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그는 이렇게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됐다.
“저같이 생긴 사람은, 연기 조금만 잘해도 엄청 잘해 보인다고 하죠.(웃음) 저에게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싶어요.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데뷔를 했어요. 무미건조할 바에는 ‘또라이’가 낫다고 생각해요. 연기 이론은 부족할지 몰라도 단체샷을 찍을 때 아무런 대사가 없어도 눈에 띌 자신이 있어요.”
배우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냐 묻는 말에는 “감독과 상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어느 정도의 배우들은 기본적인 연기력은 갖췄고, 그것을 100% 다 보여주려면 현장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가 많이 필요한데, 신인이나 무명 배우들은 감독이 말 한마디 나누기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건방질지 모르겠지만, 주연배우로 섭외가 들어와도 선뜻 못할 것 같아요. 저는 야구로 치자면, ‘포수 같은 배우’라고 생각하거든요. 야구는 투수 놀음이잖아요. 투수가 믿고 던질 수 있는, 나를 믿고 여기 저기 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이고 싶어요. 주연을 살리는 조연이라고들 말씀하시잖아요. 내 자체가 빛나는 것보다 주연이 빛나도록 이바지 하는, 그런 역할이 좋아요.”
‘골든타임’은 시청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3회 연장돼 오는 25일 막을 내린다. 드라마 종영 후에는 곧바로 영화 ‘구국의 강철대오’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는 “80년대 운동권 이야기인데, 휴먼 드라마로 풀어내 재미있는 요소가 있다”라며 “데모하는 학생 중 하나로 출연하는데, 아는 것은 엄청 많지만 겁이 많고 엉뚱한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영화에서도 쏠쏠한 재미를 선사할 전망이다.
“우스워 보이는 배우가 아닌, 유쾌한 배우로 평가됐으면 좋겠어요. 제 얼굴만 보고도 웃음이 터진다는 분들이 많아요. 가볍지만은 않은 웃음과 재미를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두정아 기자 violin80@kukimedia.co.kr 사진 박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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