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하정우의 눈빛이 영화 ‘베를린’에서 두 번 크게 빛났다. 위험천만하고도 끈질긴 추격에도 아내 련정희(전지현)가 납치된 승합차를 끝내 놓치고 무릎 꿇은 채 차가 내달리는 쪽을 바라보는 표종성(하정우)의 눈은 처연한 슬픔으로 빛난다. 그런 아내를 등에 업고 밀밭을 달리고 밀밭에 숨던 남편이 주위를 경계하며 남은 총알의 수를 세는 모습은 흡사 막다른 길에 몰린 한 마리의 짐승 같은데 번뜩이는 두 눈이 숨죽인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지난 7일 서울 삼청동에서 마주한 하정우는 첫 번째 눈빛이 표종성 감정 표현의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는 심정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어미의 뒤를 놓친 어린 사슴 같은 것이었어요. 힘든 상황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 아내 이상인 거죠. 이 장면 전까지의 표종성이 공화국(북한) 영웅으로서 모든 감정을 절제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때 이후로는 좀 더 아내에 대한 혹은 상황 자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표현하거든요. 갑갑하게 갇혀 있는 인물이 열어젖히고 나서는 시작이 되는 장면인데 그 부분을 인상 깊게 보셨다니 반갑네요. 두 번째는 막바지에 촬영됐는데 길고도 쉽지 않은 촬영으로 정말 지치고 너무 힘들었던 제 자신이 그대로 표현된, 본능 그대로의 모습이었던 것 같고요.”
무엇이 그토록 지치게 했을까.
“음…, 베를린과 라트비아에서의 촬영을 끝내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큰 산 하나를 넘었구나. 저는 저 자신에 대해 그다지 만족해하거나 칭찬하지 않는 편인데, 그때는 결국엔 이 산을 넘어 낸 제 자신이 기특하더라고요. 칭찬해 주고 싶었고, 당분간은 제게 휴식을 주고,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해 주고 싶었어요. 근데 재미있는 게, 그렇게 주어진 휴식의 시간에 한 일이란 게 ‘롤러코스터’(하정우의 연출 데뷔작) 시놉시스를 쓰고 시나리오를 쓴 일이었어요. 비행기 안에서의 스스로의 감회가 꽤나 깊었고, 또 그래서였는지 (류)승범이에게서 들은 비행기 에피소드가 떠오르면서 이미 비행기 안에서부터 영화를 시작하고 있었던 거죠. 승범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겪었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들으면서 ‘이거는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야 하겠다’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굉장히 빨리 현실이 됐어요.”
‘큰 산’이라는 말에서 그에게 영화 ‘베를린’이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고단한 과정이었는지 충분히 느껴지기는 했지만 실체가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액션 연기, 그 준비와 실행이 무척 힘들었어요.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죠. 영화 ‘추격자’나 ‘황해’의 액션은 일종의 ‘개싸움’이에요. 어느 정도의 동선과 합을 맞춘 뒤, 서로 다치지 않게 그러나 실감나게 싸우는 거죠. 하지만 ‘베를린’을 그렇게 해선 안 되잖아요. 단순한 팔 동작 하나도 상황에 직면해 혈투를 벌이면 되는 게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요원다운 힘과 각이 나와야 하는 거잖아요. 액션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류승완 감독이 대충 넘어가지도 않았고요. 단시간 안에 진짜로 무술 고단자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화면으로 보이는 만큼은 아마추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답은 끝없는 연습밖에 없더라고요. 예를 들어 손날로 상대의 목을 가격하는 동작 하나를 연기하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을 반복했어요. 손날 가격 하나가 그러하니, 표종성이 되려면 촬영 시작 전부터 반년 이상을 훈련 또 훈련해야 했어요. 무술 지도해 주시는 분과 정말 밀착해 지냈는데, 시간만 나면 촬영장 구석은 물론이고 저의 집에까지 와서 연습했다면 말 다했죠. 배우 집까지 찾아봐 연습시킨 경우가 또 있었을까요?(웃음)”
쉼 없는 연습 덕에 하정우는 영웅으로 칭송받는 첩보요원이자 잔악무도한 동명수(류승범)의 스승다운 최고수라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그가 우려한 어설픔 대신 폼 나는 액션이 눈을 즐겁게 한다. 진저리칠 정도의 고된 훈련과 촬영의 연속, 그것도 많은 부분 타국 땅에서의 작업이다 보니 ‘큰 산’으로 기억되나 보다. 하정우는 “액션배우로서의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로 영화 ‘베를린’의 개인적 의미를 설명했다.
하정우는 전지현과 부부를 연기한다. 역대 어느 영화에서보다 차분한 아름다움을 뽐낸 전지현, 그녀와의 ‘스킨십 없어도 진한’ 멜로연기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베를린’이 단순 액션영화는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뭐냐면 복잡한 국제 정세와 자기 측 이익만 생각하는 집단들이 얽혀 있고,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키는 방어적 액션만 보여줘서는 약하다고 봤어요. 이미 그런 영화들, 많기도 하고요. 관객의 눈은 속도감 있게 액션을 따라가되 마음은 러브라인과 함께 흘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스토리 흐름도 탄탄해지고 액션에 대한 공감력이 생긴다고 본 거죠. 몸으로는 궁지에 몰린 첩보원의 액션을 하면서 마음으로는 련정희와의 막혀 있는 관계를 뚫어 가는 한 남자의 감성을 연기했어요. 잘못 꼬여 버린 육신과 감성의 처지를 동시에 풀어 가야 했던 거죠. 재미있는 것은, 표종성의 첩보원으로서의 상황이 나빠진 게 아내와의 사랑에는 해결의 실마리가 됐다는 거예요.”
액션영화 속에서 멜로연기를 구축하는 하정우. 덕분에 표종성의 캐릭터에는 현실적 입체감이 더해졌고 영화도 한결 풍성해졌다. 하정우는 그 공을 전지현과 나눴다.
“한 번도 연기를 같이 해 봤거나 친분이 있었던 터가 아니라 처음엔 좀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또 만나자마자 탈출 액션을 찍어야 했고요. 그 뒤에 집안에서의 장면들을 몰아서 찍었는데, 일주일 넘게 폐쇄된 공간(웃음)에 함께 있으면서 연기하다 얘기하다, 그러다보니 금세 친해졌어요. 아니, 그 집 세트에서 탁 만나니까 왠지 모르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이 지현 씨가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일단 상대가 편해지면 연기는 순조롭죠. 그 중의 어느 한 날이었던 것 같은데 지현 씨 얼굴이 무척 배우다워 보였어요. 배우는 그때가 가장 아름답죠. 새삼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래서 한 작품 더 같이 하고 싶다고 바라고 있어요.”
끝으로 ‘하 대세’라 불릴 만큼 최고의 연기력과 흥행력을 인정받고 있는 배우 하정우에게 ‘연기자로서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아, 그건 정말 모르겠어요. 감히 말할 수도 없고요. 다만 아직 보여드릴 게 ‘더 많다’는 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제 안의 것들을 더 보여드리고 싶네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dunasta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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