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아십니까? 나는 항상 당신만을 사랑했다는 것을. 오직 당신 한 사람만을.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기품 있는 한 여인을 사랑한 가정교사 줄리엥 소렐의 고백이다. 소렐은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권총으로 저격했다가 실패하고 감옥에 갇힌 처지에서 면회를 온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육영수(1925~1974) 여사의 ‘남자들’이 육 여사를 놓고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육 여사를 주제로 한 공연 저작권 다툼이다. 극단 뮤지컬육영수 대표 윤모씨 등이 뮤지컬 ‘퍼스트 레이디’ 연출자 백모씨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라며 공연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기 때문이다. 육 여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로 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연극 ‘육영수’는 2008년 9월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 초연됐고, 당시 현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관람까지 했었다. 윤씨는 ‘육영수’에서 “백씨가 ‘육영수’의 연출도 일부 담당했던 한편 극중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의 역을 맡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백씨가 자신들의 연극대본을 빼돌려 이를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퍼스트 레이디’의 서사구조, 표현방식, 허구의 등장 인물 등이 모방됐다는 것.
반면 백씨는 “실제 연출한 사람은 나 혼자였기 때문에 두 작품이 닮은 것은 당연하고, ‘연극 육영수’와 달리 ‘퍼스트 레이디’는 저작권도 등록돼 있다”며 “내 작품만 관심을 받으니 억울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해명했다.
양측은 그러면서도 ‘순수 예술’로서 육영수를 소재 삼았음을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저작권 다툼에선 “윤씨가 연극을 통해 정치권에 가려했다는 소문이 있다”(백씨), “백씨가 정치적 욕심 때문에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 초연을 해 언론의 관심과 함께 투자를 받으려 한다”(윤씨)며 날을 세우고 있다. ‘퍼스트 레이디’가 지난 14일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임명된 고학찬씨가 운영하는 서울 신사동 윤당아트홀에서 공연 중이라는 사실도 잡음 요소다.
‘순수 예술’. 소송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처음에 정말로 예술가의 자부심으로 작품에 몰입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육영수는 사랑하는 대상이었고,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드라마투르기를 했다고 본다. 예술가로서 당대가 갖는 시대적 책무를 자각하고 대중이 갖는 정서를 읽어내 마치 현대적 의미의 ‘리벳공 로지’ 같은 노래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본다. 로지는 6시간 동안 전투기 날개에 3345개의 리벳을 박은 미국판 노동영웅으로 세계대전 후 피폐한 현실에서 대중에게 꿈을 준 캐릭터다. 우리에게 1960~70대 육영수는 고단한 서민을 달래주던 또 다른 의미의 ‘로지’였다.
그런데 그들이 저작권을 놓고 소송을 벌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부터 욕먹을 각오하고 연극 ‘육영수’를 올렸을 것이다. 또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전국 투어 공연을 했을 때도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예술가의 사랑이 순수했다고 본다.
연출가는 작품으로 시대의 고민을 표현하고, 삶을 성찰한다. ‘민비’가 뮤지컬 ‘명성황후’로 황후의 칭호를 얻은 예가 그런 성찰의 결과다. 그러나 예술가가 표현과 성찰을 놓치면 매명 욕심에 빠진다. 예기(藝妓) 이매창(1573~1610)도 임을 향해 시를 지을 땐 사모로서 끝났다.
정녕 ‘순수 예술 작품 캐릭터 육영수’를 사랑한다면, 매명이 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그들은 지금 ‘예술’과 ‘용비어천가’의 경계에 서 있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