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조선시대는 사서삼경을 달달 외고 시구 작문법을 익히면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의 관리가 됐다. 반상이 분명하던 시절이라 양민과 천민에겐 사서삼경과 작문법을 익힐 기회가 없었으므로 결국 양반네들만의 리그가 됐다.
한데 생전 마당의 풀 한 포기 뽑은 일 없던 양반이 과거를 통해 지방 수령으로 가면 그야말로 세상물정 몰라 헤매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권한은 막강해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장악한 절대권력자였다.
이 풋내기 지방 수령을 받쳐 주는 지방 관리가 조선의 지방 공무원 아전(衙前)이었다. 중앙 아전은 경아전(京衙前), 지방 아전은 외아전(外衙前)이라 불렀다. 외아전은 향리(鄕吏)와 가리(假吏)로 구분되는데 향리는 그 지방 출신으로 대대로 아전을 이어 받았다. 가리는 다른 지방 사람이 임시로 와서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 아전은 중인층 직책이었다. 때문에 양반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다. 과거 응시 자격도 제한 되어 있었고, 과전(科田)과 녹봉(祿俸)도 받지 못했다. 소위 월급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물정 모르는 수령의 눈을 속여 백성을 쥐어짜기 일쑤였다. ‘춘향전’의 변학도의 수탈은 사실상 이들에 의한 수탈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 원인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도 이들과 무관치 않다.
조선 후기가 되면 과거시험 자체가 매관매직의 현장이었다. 고관자제를 관리로 채용하는 음서제도는 기본이요, 급제시킬 놈 정해 놓고 뇌물받기, 대리시험, 시험문제유출, 커닝 등 난장판 과거시험이었다. 지방에서 실시하던 초시(初試)는 아전들의 뇌물 먹잇감이었다. 사료가 말해준다.
현대판 음서제도의 부활? ‘면접 채점표’ 특정 지원자 합격토록 작성 정황
한데 최근 국립대구과학관 직원공개채용 시험에서 음서제도와 비슷한 특혜의혹 사건이 발생해 대구·경북 사회가 떠들썩하다. 국립대구과학관은 새로 출범한 미래창조과학부 산하다.
대구과학관은 면접 전형에서 24명을 선발하면서 미래부·대구시 등의 공무원 5명, 대구시 등의 공무원(한국전력공사 등 공기업 포함) 자녀 8명을 뽑았다. 54%가 사실상 공무원이나 공무원 자녀인 셈이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공개채용과정에서 면접관이었던 선발심사위원들이 ‘면접심사 채점표’를 특정 지원자가 합격하도록 뒤늦게 작성한 정황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면접 전형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지원자를 합격시킨 것이 아니라 합격시키려는 지원자를 미리 정한 뒤에 그에 맞춰 채점표를 매겼다는 것이다.
대구과학관의 전형 과정상 면접 합격은 사실상 합격자 통보다. 1차 서류 접수에서 341명이 지원했고 이 서류 심사는 영어성적 등 객관적 자료 없이 진행돼 67명이 통과했다. 전공무관, 학점·어학성적·자격증 무관이었다. 필기시험도 없었다. 그리고 면접을 치렀고 합격한 24명은 결격사유 조회만 거치면 채용되는 것이다. 면접심사 채점표가 합격·불합격의 기준이었다. 합격하면 초봉이 4000만원이 넘는 직장이다.
고위직 공무원 자녀 가운데는 대구과학관 업무를 맡은 대구시 신성장정책관실 정책관과 서기관 각각의 딸이 합격했다. 공무원 중엔 미래부 대구과학관 업무를 하는 서기관과 농업연구관도 있었다. 조만간 퇴임을 앞둔 50대들이다.
대구과학관, 연봉 4000만원 이상 ‘신의 직장’
대구 달성경찰서가 대구과학관으로부터 채용관련 면접채점표와 지원서 일체를 입수해 분석에 나선 상태다.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채용은 지난 6월 7일 서류 접수를 해 28일 면접 합격자를 발표했다. 속전속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눈 밝은 341명이 지원했으나 별 뚜렷한 기준도 없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조선 말기 내정자 정해져 있는 과거시험에 응시한 들러리와 비슷하다.
이번 대구과학관 특혜 의혹은 정확한 수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그 채용 절차와 전형 방식은 누가봐도 의혹을 제기할 만 하다. 음서제도가 적용되는 조선사회도 아닌데 이처럼 주먹구구식 공무원 채용이 실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조선의 아전은 녹봉도 받지 못한다지만 이들은 4000만원의 고액 연봉을 받는 자리다.
중앙의 눈은 멀리 있고, 지방의 수령은 헛기침이나 해대니 세상 살판 난 아전들만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 매관매직하던 조선 후기의 사회난맥상의 재현인 것 같아 씁쓸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