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최근 광주시가 2019 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공문서(국무총리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재정보증서류)를 위조한 사건을 다들 아실 겁니다. 광주시가 개최도시로 선정되긴 했지만 여간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체부는 강운태 광주시장을 공문서 위조 혐의로 수사의뢰하는 그치지 않고 정부 예산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섰고 광주시는 정부가 실무직원의 실수에서 기인한 것임을 잘 알고 있고 바로 시정했는데도 개최도시 발표를 불과 몇시간 앞두고 언론에 흘린 것은 '강운태 시장 죽이기'의 불순한 음모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강 시장측이 이같이 보는 것과는 달리 문체부는 유치결정일에 공문서 위조 사실을 공표한 바 없으며 OO일보의 취재에 따라 보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명해왔습니다.). 공문서 위조 사건이야 말로 있어서는 안 될 중대한 사안이고 법의 준엄한 판단이 있어야할 것이지만 한켠에서는 믿기지 않은 정치적 음모설이 돌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강운태 시장, 박근혜 대통령 심기 건드린 '괘씸죄'?>
그 음모설의 실체가 광주지역에서 나돌고 있습니다. 소문인즉, 강운태 시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 때문에 이같은 사건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언론에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 맞았던 제33회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전후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공식 기념곡 지정을 둘러싸고 정부와 5·18관련 단체들을 비롯한 광주시민들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강 시장은 5·18 관련 단체들과 광주시민 편에 서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여기까지는 정치인 출신 강 시장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강 시장이 광주지역의 정서를 외면할 재간이 없었을 것이란 짐작이 갑니다.
그럴듯한 소문은 다음 이야기에 있습니다. 강 시장은 박 대통령이 참석한 제33회 5·18 기념식에서
미리 양복 안주머니에 챙겨갔던 소형 태극기(사진)를 불쑥 꺼내어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 박 대통령의 손에 쥐어주는 '결례'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전국에 방영될 TV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박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태극기를 받아들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는 2분여 동안 어정쩡한 자세로 태극기를 흔드는 '벌'을 섰다는 것입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는지는 알수 없지만, '공문서 위조' 사건이 터지면서 그럴듯한 음모설로 비화된 것같습니다.
<합창도, 제창도 남김없이~태극기만 나부껴~>
그래서 당시 보도 내용을 검색해봤습니다. 마침 제가 [친절한 쿡기자]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정확히 오전 10시에 기념식장에 입장했습니다. 기념식장에는 양희승 5ㆍ18구속부상자회장, 박준영 전남도지사, 강운태 광주시장, 박승춘 보훈처장,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공동대표, 현오석 경제부총리,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뒷 열에 앉은 김범일 대구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김무성 새누리당 국회의원, 안철수 무소속의원, 정세균ㆍ박지원 민주당 전직 대표 및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국민의례와 헌화, 분향, 경과보고에 이어 박 대통령은 기념사를 낭독했습니다.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큰 진전을 이뤄냈지만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않고 있다"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지역을 넘어, 아픔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동적 발전을 위해 다같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5·18 정신이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으로 승화돼야 한다", "앞으로 정부는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 국가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겠다"라는 등 '국민통합'의 의지를 수차례에 걸쳐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기념사가 끝난 뒤 뿌리패예술단의 공연 이후 서울로얄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인천 오페라합창단이 협연한 ‘임을위한행진곡’ 합창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민주당 의원들과 유족들이 먼저 일어나서 태극기를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모두 기립했습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 김문수 경기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김범일 대구시장, 강운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남지사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창했으며, 특히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먹을 쥐고 흔들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제창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따라 부르진 않았습니다. 국민의례 순서에서 애국가를 따라불렀던 것을 보면 의도적 침묵으로 보여집니다. 대신에 박 대통령은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위 사진 참조)
여기에는 강운태 광주시장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습니다. 광주시 등에 따르면 강 시장은 이날 오전 광주공항에 도착한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해 공항 귀빈실에서 잠시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 시장은 "광주시민은 박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을 환영한다"며 ‘임을위한행진곡’을 둘러싼 논란을 설명한 뒤 "대통령께서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릴 때 태극기를 들어주시면 국민대통합에 기여하실 것"이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어 강 시장은 "제가 태극기 2개를 준비하겠다"며 "하나는 대통령 것이며, 또 하나는 제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동참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습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박 대통령은 기념식장에서 ‘임을위한행진곡’ 합창 공연이 있자 강 시장에게 시선을 줬고 강 시장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박 대통령에게 건넸다는 것입니다. 강 시장의 작전(?)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합창도, 제창도 아닌 태극기를 나부끼는 기지를 발휘함으로써 국민통합의 새 날이 올 때를 고대한 것일까요.<당시 [친절한 쿡기자] 기사 중 발췌>
<문체부, '편협한' 박 대통령이란 나쁜 여론 빌미 제공 '동의 못해'>
당시 보도엔 박 대통령이 난감한 상황에서 합창도, 제창도 아닌 태극기를 나부끼는 걸로 위기를 모면했는데, 지금의 소문은 강 시장이 박 대통령의 용린(龍鱗·천자나 영웅의 위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건드린 '중대사건'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정치적 음모설로 비화된 포인트인 것같습니다.
쿡기자가 펜을 든 것은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체부의 매끄럽지 못한 일 처리 방식이 결국 '속 좁고 편협한' 박 대통령이라는 나쁜 평판을 초래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서입니다. 형님격인 정부가 아우뻘인 광주시를 준엄하게 꾸짖고 패털티를 준 뒤에 예방 차원에서 공론화됐다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 부분에 대해 문체부는 원래 유치 결정 이후 언론에 공표할 예정이었다고 해명해왔습니다. 그렇더라도 몇시간 보안을 유지하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쿡기자가 20년 이상 취재한 경험으로 볼 때 절대 보안이 절실했을 광주시보다는 상대적으로 느긋했을 문체부를 비롯한 상대 취재영역에서 기자에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리고 기자가 확인 취재에 들어가자 쉽사리 시인해버린 것은 '미필적 고의'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론이 취재에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뉴스정보를 가진 쪽이 의지만 있다면 몇시간 보안을 유지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볼썽사나운 사단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대통령의 5·18 행사와 연결짓는 (문체부와 청와대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억측은 더더욱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정부가 예산 지원도 않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도 뒷말이 들려오지만, (문체부는 예산 지원 불가 방침도 처음 공문서 위조사실을 인지했을 때 광주시의 요청에 따라 개최지 결정 이후 수사의뢰키로 하고 재정지원 불가 방침도 대회유치위원회에 통보했으며 광주시도 이에 동의한 사인이라고 알려왔습니다. 또 이처럼 공문서 위조라는 절차적 흠결은 정부와의 약속을 저버린 행위로써 수사의뢰와는 별개로 개최도시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습니다.)
<朴대통령, 평창 올림픽은 챙기고 광주 수영대회는 '나몰라'?>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이 어제(23일)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 떠오릅니다. 박 대통령은 기자들이 지켜보는 오프닝 발언에서 정전 60주년 기념식, 청년 일자리 문제와 고용률 70% 실현, 현오석 경제부총리 격려, 영훈국제중 지위 배제 등의 발언에 이어 말미에 평창 동계올림픽에 관한 언급을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지 2년이 지났다"면서 "평창 동계올림픽은 88 서울올림픽이 열린지 약 30여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의 올림픽 역사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올림픽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테스트 이벤트를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3년 반 앞으로 다가온 것"이라며 "정부는 물론이고 조직위원회와 강원도, 대한체육회를 비롯해서 국민 모두가 지혜와 힘을 모아서 성공적인 대회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정부 각 부처는 동계올림픽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행정적ㆍ재원적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우선적으로 챙겨 주기 바라고,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어떤 애로점이 있는지를 찾아서 해결점을 적극적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박 대통령은 덧붙였습니다. 이를 위해
현재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구성돼 있는 대회지원위원회를 더욱 활성화해서 대회 준비를 종합적으로 정비하고 지원체계를 확립하기 바란다고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대통령이 갑자기 국무회의에서 평창올림픽 준비 상황을 특별히 챙겨야할 만큼 최근에 이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꼽자면 다음날(23일)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 갖는 강원도 업무보고를 앞두고 언론을 통해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에 하나 더 눈에 띈 것은 평창올림픽 개최 기간이 2018년 2월 5일부터 25일까지라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임기 5년을 마치는 마지막 국제 스포츠 행사인 거죠. 잘 마무리하고 '업적'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강원도 업무보고에서 춘천~속초 간 동서고속철도와 여주~원주 간 복선전철 사업에 대해 언급하면서 "꼭 경제성 만으로 지역공약사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는 이 사업을 관광객 유치 등 지역경제 활성화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유라시아 철도와의 연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파격 선언까지 했습니다.
이에 비해 광주시가 유치한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박 대통령이 퇴임한 뒤인 2019년에 개최됩니다. 규모로 볼 때도 하계올림픽 수영 종목 다음의 큰 대회로 단일 종목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코끼리 비스켓 만한 인심만 써도 생색낼 일입니다. 박 대통령의 말씀에 빗대어 부연하자면 나쁜 민심까지도 살펴야할 정치 행위는 꼭 경제성이나 행정적 판단 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왕 국제스포츠 행사를 강조하는 김에 광주시의 세계수영선수대회 유치에 대해서도 국민 통합적 차원에서 갈무리해줬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박 대통령이야 아래에서 챙겨준 자료를 근거로 말씀하셨을테고 이를 준비해준 보좌진들의 국민통합적 마인드가 부족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학습했듯이 괴소문은 소통이 막혀있을 때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유언비어의 난무는 박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누차 강조했던 '국민통합, 국민행복'과는 거꾸로 가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체부는 "공문서 위조라는 분명한 범범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마치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번 사건이 터졌다는 기사의 톤은 동의할 수 없다"며 "공문서 위조 수사의뢰와 재정지원 중단 등은 대통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5·18 행사 태극기와 관련지어 보도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호도하고 독자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쿡기자는 정치적 고려가 없었다는 문체부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공문서 위조' 사건 이후 광주지역에서 정부(문체부)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을 이상한 민심이반 조짐이 있으니 잘 챙겨보라는 동기에서 펜을 든 것임을 강조하는 바 입니다.
문체부의 해명과 함께 청와대에서도 반론이 왔습니다.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대한민국 국민 중에 대통령에 대한 이같은 황당한 음모설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이 기사로 인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결과가 초래될까 심히 우려스럽다"고 강한 유감을 표명해왔습니다. 저 역시 공감합니다. 유언비어 수준의 진상을 알고 보니 얼토당토 않은 것에서 비롯됐고 그런 것마저 나오지 않도록 청와대 보좌진과 정부 당국자들이 대통령을 잘 보필하라고 권고하는 취지였으니까요.
글을 마치면서 문득 지난 4월 24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편집국장과 보도국장 초청 오찬 간담회 석상에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박 대통령은 질문을 받고는 “언론과 칼럼을 통해 기사도 보고 기사 외 인터넷 보고 인터넷 댓글까지 본다”고 답했습니다. 정말로 “엄청 많이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모두 국민의 생각”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참, 공감했었습니다. 정재호 디지털뉴스센터장 j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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