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그 숲길 다시 가보니] 금대봉의 갈매나무

[임항 논설위원-그 숲길 다시 가보니] 금대봉의 갈매나무

기사승인 2014-07-27 13:08:55

갈매나무를 만나러 지난 22일 금대봉에 갔다. 시인 백석이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고 읊은 그 나무 말이다. 갈매나무는 여름에는 짙푸르고 무성한 잎이, 겨울에는 가시처럼 삐죽삐죽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이 야성미를 자아낸다. 갈매나무과의 낙엽활엽관목 또는 소교목으로 다 크면 키가 5m 가량 된다. 작은 키인데도 강한 야성으로 위엄을 갖춘 모습이다.

출발점인 두문동재(싸리재)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 화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아스팔트 포장길인 이 고개 정상(1268m)의 남쪽으로는 함백산(1573m), 북쪽으로는 이번 탐방의 목적지인 금대봉(1418m)~분주령~대덕산(1307m)~검룡소에 이르는 길이다. 능선을 주로 통과하는 이 숲길은 남한 최대의 고산 들꽃 군락지로 유명하다. 두문동재 입구에는 대덕산·금대봉 생태·경관보호지역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환경부와 전문가들이 1993년 이 일대의 식생을 조사하고 높은 종 다양성을 확인한 후 126만평을 생태·경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지난해 5월25일 이 길을 걸을 때에는 봄철 야생화가 만발했었다. 지금은 여름 꽃이 한창이다. 주황색 동자꽃, 노란 꽃이 핀 짚신나물, 보라색 동그란 꽃잎에 애기 실핏줄 같은 선들이 그어진 둥근이질풀, 1m가량 큰 키에 쌀알만한 노란 꽃들이 촘촘히 모여 있는 마타리, 하늘을 향해 꽃을 피운 하늘나리, 곧게 선 가지 끝에 자주색 꽃 한 송이만 달린 일월비비추 등이 지천이다. ‘하늘정원’, ‘산상화원’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다음 주에 함백산 야생화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꽃이 더 좋으냐, 나무가 더 좋으냐’는 질문도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처럼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꽃보다는 신록이 더 좋아진다고 하는 말이 조금은 실감이 난다. 참나무과 나무들에서 애기 손가락 모양으로 돋아나는 연두색 이파리 말이다. 어쨌거나 남들은 야생화만 눈에 들어오는 이 시기에 갈매나무의 짙푸른 잎과 상봉하기 위해 금대봉 오르는 길을 버리고 지름길을 택했다. 갈매나무는 계곡과 능선의 햇빛 잘 드는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탐방로 옆에서 첫 갈매나무를 만났다. 키에 비해 굵은 줄기가 첫 눈에 인상적이다. 거칠게 부풀어 일어난 외피가 역시 강인한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일조한다. 줄기의 외피가 조금씩 벗겨져 일어난 나무 가운데 물참나무의 수피는 그나마 가지런하지만, 갈매나무 수피는 울퉁불퉁하다. 갈매나무의 작은 가지 끝은 가시로 변한다. 이리 저리 뻗은 잔가지들에서 원시의 야성미가 물씬 풍긴다. 두툼한 편인 잎이 불투명한 녹색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잔 톱니를 지녔다. 언뜻 감나무 잎을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더 긴 타원형이다.



어떤 숲길을 걸으려고 할 때 한 가지 식물만 보겠다고 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변산바람꽃, 동백, 철쭉 등의 꽃을 보려면 개화시기에 맞춰서 가야 한다. 그러나 금강송, 구상나무, 주목, 대나무 숲 등은 언제 가도 나름대로의 멋과 운치가 있다. 갈매나무도 그렇다. 백석이 떠올린 갈매나무는 겨울의 눈 속에서 만나야 제격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짙푸른 잎이 좋다. 초록색의 순우리말이 갈매 혹은 갈맷빛이니까 갈매나무라는 이름도 잎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런가하면 비록 아직 사진으로 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늦가을의 갈매나무도 매력적이다. 잎의 초록빛은 사라지고, 팥알만한 새까만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마지막 부분) 갈매나무는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어요, 이미지다. 겨울에 하얀 눈을 맞고 선 갈매나무는 백석의 마음속에서 ‘굳고 정한’ 심상을 지녔다.


갈매나무는 중국, 극동러시아, 아무르강, 우수리강,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함경남·북도에서 강원도까지 주로 백두대간에 분포한다. 1940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 살았던 백석에게 갈매나무는 흔하지는 않았더라도 친숙하기는 했을 것이다. 또한 위도 차이를 감안한다면 함경도나 평안도에서는 고도가 비교적 낮은 곳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해방 후 신의주와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를 거쳐 45년 말부터 59년 초까지 평양에서 살았다. 백석이 해방 후 어수선한 분단정국에서 북한에 남아 번역작업에 몰두할 때인 1948년 10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학풍’ 창간호에 발표됐다. 남한의 잡지에 발표된 백석의 시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가 씌어진 시기는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시인 안도현은 최근 펴낸 ‘백석평전’에서 이 시가 해방 직후 창작됐고, 미·소공동위원회가 합의한 우편물 교환을 통해 남측에 전달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제목이 편지의 겉봉에 쓰는 주소 형식으로 돼 있다는 점, 시의 앞부분이 마치 편지처럼 자신의 근황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 어조가 담담한 고백체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걸으니 더 큰 갈매나무가 나타났다. 키가 5m에 육박하는 이 개체는 밑둥치 지름이 20㎝가량 되는 고목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웅크리고 앉아서 올려다보니 무섭고도 신비한 동화의 나라 안에 들어선 느낌이다. 바로 옆에는 키가 조금 더 큰 야광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올해 강우량이 적어서인지 갈매나무마다 열매가 얼마 달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갈매나무 고목에는 그나마 열매가 맺힌 편이었다. 갈매는 이 나무의 팥알만한 열매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하다.



갈매나무는 햇빛을 좋아하면서도 건조한 곳을 싫어해 습지나 계곡에서 잘 자란다. 환경단체 ‘우이령사람들’의 이병천 회장(산림생태학 박사)은 “갈매나무나 야광나무는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계곡의 물안개, 높은 능선지대에서는 운무 덕분에 잘 발아되고 번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금대봉 일대는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해당되므로 동해로부터 고온다습한 바람을 받아 운무가 잘 형성된다. 갈매나무는 또한 추위를 잘 견디지만, 공해에는 약하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곳이 많지 않기에 갈매나무는 흔하지 않다.



백석은 그의 다른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일제 강점기와 해방전후 공간에서 이념 다툼의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 싫었던 독립적 지식인의 고뇌를 호소력 있게 그려냈다. ‘이 흰 바람벽엔/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평론가들이 지적하듯 자기 속내를 직접 토로하지 않고 흰 바람벽의 지나가는 글자로 말하게 한 기획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만연체 문장 말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었다’의 객관화 수법과 일맥상통한다. 젊을 때 결벽이 있었고, 멋진 외모를 지닌 일본유학파 모던보이였던 백석은 문단의 기라성 같은 선후배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본어로 작품을 쓸 때에도 결코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갈매나무를 동경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삼거리에서 분주령으로 향하자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숲길로 들어섰다. 좀처럼 보기 힘든 층층나무 고목, 밑둥치 지름이 40㎝에 이르는 까치박달 고목 등이 하늘을 가렸다. 피나무와 산사나무 등도 연륜을 자랑하는 고목들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산이든지 박정희 시절 산림녹화정책 덕분에 대개 조림지가 형성돼 있다. 그런데 속성수(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더라도 어떤 나무를 심었느냐에 따라 산의 종 다양성이 좌우됐다. 일본잎갈나무(낙엽송) 조림지의 경우 이 나무가 겨울철 잎을 다 떨어뜨리고 난 후 4월이 돼서야 새 잎이 나기 때문에 초 봄 키 작은 초본들의 성장과 번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잎갈나무 조림지와 그 주변의 종다양성은 높다. 반면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조림지는 이들 침엽수가 햇볕을 독점함으로써 다른 풀과 나무의 생장을 방해한다.


금대봉과 대덕산 일대는 조림지 면적이 넓지 않은데다 모두 일본잎갈나무다. 그 덕분에 노랑무늬붓꽃, 태백기린초, 터리풀, 금강제비꽃, 도라지모시대, 홀아비바람꽃 등 한국특산식물 15종, 모데미풀, 가시오갈피 등 희귀식물 16종이 서식하고 있다. 검룡소로 내려가는 길에는 노랑투구꽃이 많고, 멸종위기종인 대성쓴풀 자생지도 있다. 금대봉에서도 산림청이 지난 2000년 야생화만 밀집한 곳에 잣나무 조림지를 만들었으나 그 후 일부 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잣나무를 차례차례 모두 제거했다.



대덕산 정상 부근에서 산돌배나무의 아종인 취앙네(취향리)를 만났다. 분류학자들 중에도 산돌배나무와 돌배나무를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 이들이 있지만, 취앙네는 열매의 햇볕을 많이 받는 부분이 사과 부사품종처럼 발갛게 익는다는 점에서 돌배나무나 산돌배나무와 뚜렷이 구분된다. 대덕산과 금대봉 일대에 산돌배나무의 개체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 중에는 고목이 많다.



취앙네는 안성배의 원조이다. 안성배는 취앙네를 원종으로 삼아 개량된 것이다. 북방계 식물인 산돌배나무나 취앙네는 원산지인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안성배 등 먹기 좋은 개량종이 나오면서 식용으로는 가치를 잃었다. 하지만 술이나 약의 재료로는 날로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만주 시절의 백석도 취앙네를 먹어본 적이 있었나 보다. ‘이왕이면 香향내 높은 취향리梨 돌배 움퍽움퍽 씹으며 머리채 츠렁츠렁 발굽을 차는 꾸냥과 가즈런히 쌍마차 雙馬車 몰아가고 싶었다’(안동, 마지막 부분) 돌배가 딱딱한데다 맛은 없지만, 향은 좋기 때문에 돌배술은 우리나라 모든 과실주의 왕이라고 할만 하다.

두문동재~대덕산 트레킹코스를 탐방하려면 태백시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하거나 두문동재 관리초소에 등록해야 한다. 하루 300명으로 탐방객 수를 제한한다. 탐방 사전예약제를 하는 것은 좋은데 환경부의 업무위탁을 받은 태백시 공무원들이 9시가 돼야 초소에 출근한다면서 방문허가증을 받으려면 9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발한 기자 일행은 사전예약을 해 놓고도 방문허가증 없이 이 길을 걷다가 곳곳에서 감시원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전형적인 공무원 편의주의가 아닐 수 없다.


대덕산에서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로 내려 왔다. 한국특산식물이 많고, 갈매나무가 많이 사는 고산지대에서 평안도 사투리를 고집했던 백석의 넋을 다시 기려본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임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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