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염전은 중국보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옥이 따로 없었죠. 너무 힘들어서 1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돈을 안 주더라고요. 경찰에 신고해 어찌어찌 절반은 받아냈죠.”
손과 얼굴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눈은 충혈돼 있었다. 전남 목포의 한 염전 사업장에서 1년을 꼬박 일하고도 400만원 밖에 못 받았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밝았다.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빅판’ 이성용(37)씨 이야기다.
2010년 7월 국내에 첫발을 디딘 빅이슈코리아는 홈리스에게 자활의 계기를 주기 위해 창간된 대중문화 잡지다. 1991년 영국에서 시작돼 현재 10개국 15종이 발간되고 있다. ‘빅판(빅이슈 판매원의 줄임말)’이 되기 위해서는 노숙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재기하고자하는 의지가 커야 한다.
지난 2일 서울 당산동에 위치한 빅이슈코리아 판매국에 출근한 이씨의 손은 분주했다. 빅판 20여명이 잡지를 비닐로 감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매일 아침 할당량을 전달받아 팔수 있을 만큼 잡지를 포장한다.
젊은 시절 중국으로 건너간 이씨는 중국인 아내를 만나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공사장 막일과 염전일을 번갈아 해야했다. 중국보단 한국이 나을 거란 생각에 2010년 바다를 건너왔지만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2011년 목포의 한 염전회사에 들어가 딱 1년을 채웠다.
“쉬는 날 없이 일했어요. 음식도 정말 안 좋았죠. 김치와 밥만 줬어요. 중국보다 시설이 좋단 말에 왔는데 차라리 중국에서 일하는 게 더 낫겠더라고요. 월급도 중국이 더 많았어요. 한국에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이씨가 일한 곳은 노예처럼 부리진 않았지만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사업주는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염전에 들어가 일을 해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씨는 지난 2월 터졌던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을 떠올렸다. 이씨는 “뉴스를 보다가 일을 그만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돈을 안 줬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때 분위기 때문에 겨우 돈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오래전 경제적 문제로 이혼했다. 현재 아이들은 이씨의 부모가 맡아 키우고 있다. 그는 한동안 자책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랬던 그가 빅이슈코리아를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일을 하면서 노숙을 한 적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때 노숙을 한 기록이 남아 있어 빅판이 될 수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결심을 하나 했죠. 술을 끊자. 그래서 술을 입에 안 댄지 5개월이 넘었어요. 또 매일 출근해야 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됐죠. 토요일에도 판매해요. 전 교회를 가야해서 일요일엔 쉬는데 자신이 원하면 일을 해도 돼요.”
이씨의 보물은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찍힌 통장이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찍혀 들어오는 숫자를 보면서 힘을 낸다. 그는 두 달 정도만 더 모으면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는 금액이 모여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며 기뻐했다.
“앞으로의 바람은 아들딸과 함께 사는 거예요. 1년 안에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고 아이들과 놀러 다니고 싶어요. 자라나는 아이들은 나처럼 고생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아빠의 마음이죠.”
일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는지 물었다.
“다른 건 괜찮은데 거리에 서서 소리치면서 일하다보니 더위 때문에 힘이 들어요. 보통 사람들은 겨울에 더 힘들 거로 생각하는데 여름보다 겨울이 낫다니까요.”
서울 신사역 8번 출구가 이씨의 자리다. 오후 12시가 되자 정성스레 포장한 잡지를 가방에 넣어 떠날 채비를 했다. 밖은 땡볕이었다. 무더위가 이어진 이날 한낮 기온은 36도까지 치솟았다.
“빅이슈가 한국에 들어온 지 4년이 넘었는데 아직 어떤 잡지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잡지를 팔면서 저도 읽어보는데 재밌는 내용이 많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이 빅이슈 잡지를 알게 되고, 빨간 옷을 입은 우리가 보이면 다가와 줬으면 좋겠어요.”
김민석 기자 ideae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