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부장판사가 원세훈(사진)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강하게 비판해 논란이 예상된다. 일선 판사가 다른 판사의 판결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 발언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45·사법연수원 25기)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7시쯤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여기서 김 부장판사는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사기’에 나온 고사성어인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르는 상황을 비유한다.
그는 “집행유예 선고 후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정독했다”며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정말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이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며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 이것은 궤변”이라고 강조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 판결은 정의를 위한 판결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인가”라고 묻고서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 부장판사는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본다”며 “현 정권은 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고군분투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을 꿋꿋이 수사했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 스캔들을 꼬투리로 축출됐다”며 “모든 법조인이 공포심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에 “나를 좌익판사로 매도하지 말라. 판사로서 법치주의 몰락에 관해 말하고자 할 뿐”이라며 “지난 대선에서 여당과 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정치에 관여했다며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인정했지만, 대선에 개입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부장판사는 21기로 김 부장판사의 연수원 4기 선배다.
대법원은 김 부장판사의 글을 직권으로 삭제한 상태다.
대법원은 “코트넷 운영위원회가 ‘사법부 전산망 그룹웨어 운영지침’에 따라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수 있는 글이라 판단해 직권 삭제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법관윤리강령에 나타난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 의무 규정을 위반할 여지가 있는 글”이라며 “이밖에 다른 법관의 사건을 공개 논평하지 못하도록 한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 권고의견 등에도 반한다”고 설명했다.
김현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