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4일. 대한민국 태권도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날일지도 모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03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입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4년 9월 15일은 대한민국 태권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날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가장 수치스런 날입니다. 태권도 경기에서 시 협회 차원의 조직적인 승부조작이 이뤄지고, 이것이 태권도 선수인 아들의 아버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사실이 밝혀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승부조작보다도 한국인의 입에서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빼라”는 말이 나온 날이라 더 수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발표한 내용은 충격적입니다.
수사의 계기가 된 경기는 지난해 5월 28일 전국체전 고등부 서울시 태권도 핀급 대표선발전입니다. 이 경기에 출전한 선수의 아버지이자 모 대학 태권도학과 교수 최모(48)씨가 비극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입상 실적을 만들어달라”고 모 중학교 태권도 감독 송모(45)씨에게 청탁했습니다. 송씨는 최씨의 중·고교·대학 후배였습니다. 송씨는 ‘오랜 선배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고, 청탁은 서울시 태권도협회 김모(45) 전무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협회 기술심의회 의장 김모(62)씨에게 ‘승부조작’을 지시했고, 이는 다시 협회 심판위원장 남모(53)씨에서 협회 심판부위원장 차모(49)씨를 거쳐 해당 경기의 심판이었던 또 다른 차모(47)씨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이 제공한 동영상 속에서 종료 50초 전 피해 선수에게 작심하고 경고 ‘삿대질’을 날려대던 차씨. 그는 정작 누구의 지시인지도 모르고 이 같은 ‘쇼’를 펼쳤습니다. 하수인은 윗선이 누군지도 모르는 ‘점조직’ 방식이었습니다. 경찰 조사결과 이런 승부조작이 태권도계에서 ‘오더’라는 은어로 불린다는 사실도 밝혀져 그동안 관행적으로 벌어져왔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돈 아니면 태권도 명문으로 불리는 특정 대학의 ‘연줄’이 있었고, 아들이 편파판정으로 진 것에 대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라는 희생양을 만들었습니다. 그 아버지 역시 태권도 관장이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네티즌들의 비난·원망의 목소리가 잇따르는 건 당연합니다. 이 중 가장 가슴 아픈 건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 자격이 없다” “창피한 태권도는 빼고 일본 가라데나 중국 우슈를 넣어라”라는 의견입니다.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이인 일본·중국에 조금한 것 하나라도 밀리기 싫어하는 한국인들이 오죽하면 먼저 이런 소리를 할까요. 그만큼 충격과 실망이 컸다는 반증입니다.
그럼 이번 사건이 원흉이 돼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퇴출될 수도 있을까요.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태권도 인구는 세계적으로 확산된 지 오래입니다. 국제경기에서 더 이상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량이 압도적이지도 않습니다. 종주국내 체전 대표선발전에서의 비리 적발 정도로 세계적 행사에서 퇴출하기엔 너무 커버린 종목입니다. 또 올림픽 정식종목 잔류·채택·탈락 문제는 단순 규정보다는 스포츠 외교력과 로비 활동의 영향력이 더 큽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IOC가 쟈크 로케 위원장 체제였을 땐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유지·탈락 등을 결정하는 IOC 집행위원회가 1년마다 열렸지만 현재(토머스 바흐 위원장, 2013년 9월 부임)는 그렇지 않다. 향후 일정이 어떻게 될지도 아직 모른다”며 “결국 투표를 하는 집행위원 개개인이 이 같은 사건에 영향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해도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계태권도연맹(WTF) 조정원 총재는 지난 6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2월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집행위원회를 지켜보며 보낸 1주일은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역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잔류할지 확신하지 못했던 겁니다.
스포츠 외교력은 우리만 가진 게 아니고 로비 활동도 우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나라의 이런 사실을 부각시키며 태권도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쓸지도 모릅니다. 네티즌들의 비난이 현실이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안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작은 걸 방치하다가 큰 일이 일어납니다.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 회복을 소홀히 한다면 언젠간 큰 일이 날 수 있습니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