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현섭 기자] 2010년 3월 26일 일어난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남북 인사 간의 비밀 교차방문이 이뤄졌던 사실이 전해졌다. 이 같은 사실은 29일 연합뉴스가 입수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드러났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천안함 폭침에 따른 5·24 대북제재 조치 직후인 2010년 7월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방북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에 따르면 이는 북한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은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메시지를 보내와 국정원 고위급 인사와 접촉하고 싶다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면서 방북한 국정원 고위 인사가 이 같은 입장을 북측에 전했음을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그러자 북측은 (당사자가 아닌) ‘동족으로서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남의 상갓집에 들러 조의를 표하는 수준의 사과를 하겠다는 것이었다”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였고, 그 같은 애매한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이후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인 같은 해 12월엔 북측 인사가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12월5일 북측 인사가 비밀리에 서울에 들어왔다. 대좌(우리의 대령) 1명, 상좌(대령과 중령 사이) 1명, 통신원 2명을 대동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나는 그들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면서도 “양측은 협의 끝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북측 인사는 예정보다 하루 더 서울에 머문 후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을 방문한 북측 인사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2011년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공개 처형됐다는 것이다. 당시 권력 세습을 준비하고 있던 김정은 측과 군부에 의해 제거됐다는 얘기도 들려왔다”고 소개했다.
남북은 평양·서울에서의 잇따른 접촉이 무산된 이후 2011년 초 뉴욕(유엔주재 북한 대사와), 같은 해 5월 베이징에서 추가 접촉했지만 천안함 폭침 사과 문제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고 이 전 대통령은 전했다.
2011년 베이징 접촉은 북측이 비밀접촉 사실을 일방적으로 폭로하는 바람에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일련의 남북 비밀접촉을 ‘평양과 서울, 뉴욕, 베이징 3단계 접촉’이라고 표현했다.
2009년 10월 당시 임태희 노동부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간 이른바 ‘싱가포르 접촉’ 뒷얘기도 소개했다.
북측은 당시 핵문제와 관련, ‘폐기’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공동노력’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고, 국군포로 한두 명을 ‘영구 귀환’이 아닌 ‘고향방문’으로 할 수 있으며, 정상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쌀과 비료 등의 대규모 경제지원 약속을 요구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현인택 통일부장관을 통해 임 장관이 북측와 협의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같은 해 11월 7일과 14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북측 통일전선부 간 실무접촉이 열렸지만 북측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 1억달러 상당의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달러 등을 일방적으로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전했다.
연평도 포격 직후 서울에 이어 평양을 방문했던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북측에 “이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남북 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북측에 언급한 내용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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